[만화리뷰] 슈퍼우먼 콤플렉스 'Beauty Space'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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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y Space'의 출발은 의욕적이었으며 그 시도만으로도 신선했다. 여성과 가장 친숙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만화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출산과 육아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My Funny Baby'를 통해 (이진경이나 한혜연 등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
여성만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 김지윤은 신작을 통해 '일하는 여성'이라는 화두를 붙잡았다. 한국 만화에 등장하는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만화가'이거나 아니면 '멋진 전문직', 그리고 '협업자' 뿐이었다. 일상에서 일하는 모습은 한두편의 단편을 통해 에피소드를 통해 오버랩되는 것이 전부였다.

화장품 전문점에서 일하는 여성들

아무 것도 모르는 초보 사원 호선이 화장품 전문점에 출근한다. 명랑한 학생처럼 보이는 캐주얼한 복장으로 가게에 등장한 호선에게 가게 사장이자 친언니인 미선은 "화장품은 여성스러움을 강조하고 창조하는 상품"이기 때문에 캐주얼은 판매사원의 복장으로 적당하지 못하다고 화를 낸다. 그리고 지하 상가를 돌며 여성스러운 블라우스와 스커트, 굽이 있는 구두를 사고 머리 스타일을 바꾼다. 눈썹 모양을 새롭게 만들고, 메이크업 베이스와 트윈 케익 그리고 아이섀도우와 마스카라, 속눈썹, 립스틱을 이용해 전혀 새로운 얼굴로 변신한다. 변화한 모습을 보고 호선 스스로도 "이게… 정말 나야?"라고 놀라워한다. 호선의 변신을 보려고 상가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밉지 않은 과장도 나오고, 그 자리를 이용해 화장품을 판매하는 사장님의 탁월한 상술도 등장한다.

화장품 판매 사원으로 프로정신을 강조하는 사장님 언니는 미용사원(화장품 브랜드의 판매 사원)
을 대할 때는 냉정하며, 손님을 대할 때는 몇 년 전의 기억까지 떠올리는 세일즈의 달인이다. 반면, 호선은 물건의 이름이나 특징도 아직 채 외우지 못한 초보 중에서도 초보다. 화장품 전문점의 독특한 매카니즘이 등장하면서 친근하지만 낯선 전문 영역을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경쾌하게 스케치하고 지나가고 초보 호선의 성장과 명랑한 연애관계까지. 한마디로 통통 튀는 스타카토로 전개된다.

그런데, '일하는 여성'이라는 김지윤의 화두는 현실과 조우하면서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한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무시무시한 가면 속의 얼굴을 드러낸다. 10대 연예잡지의 인터뷰 기자 키레이를 등장시킨 오사카 미에코의 '아름다운 시절'과 비교해 보면 모든 일을 잘 해야하는 일하는 기혼 여성의 처절함이 더욱 부각된다.

모든 것을 잘 해내던, 철저한 프로 정신의 'Beauty Space'의 사장인 미선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폭력 앞에서는 나약하기만 하다. 도도한 시누이의 무뢰함,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얽힌 보증의 사슬, 무능한 시동생에 대한 분노. 그리고 비록 작품에 전면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아니라고 해도, 사업에 실패한 남편에 대한 부담, 육아에 대한 무거운 책임, 함께 살고 있는 시부모님과의 갈등도 또아리를 틀고 있을 법하다.

'Beauty Space'의 겉모습은 초보 호선의 프로 여성 되기, 여성들만의 공간인 화장품 전문점, 호선의 명랑한 연예담 등으로 이어지지만 그 깊숙한 이면에는 한국 기혼 여성의 참담한 현실이 있다.

왜 화장품 전문점이라는 공간인가?

화장품 전문점 'Beauty Space'는 프로 언니 사장님과 초보 호선이 부대끼는 작품의 공간이다. 'Beauty Space'는 손님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에게 새로운 물건을 권하며, 스스로 신상품 모델이 되어 구매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전문적인 일상과 비즈니스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공간이 구체성을 획득하면서 여성의 노동과 여성의 프로정신(=아름다움)
은 화장품을 통한 외적 미모로 일대일 등가교환된다. 화장품 전문점 = 미의 공간(Beauty Space)
= 외적 가치 = 여성이라는 등식이 설립된다. 시누이 남편이나 사장님의 남편이 실패한 경영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영위하는 노동의 공간은 화장품 대리점이라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Beauty Space'라는 제목의 함축적인 의미는 입맛을 씁쓸하게 한다.

이러한 씁쓸한 기분은 중반 이후 호선의 연예관계와 그 허무하기 그지없는 결말에까지 이어진다. 작가가 제기한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지닌 여성의 좌절, 가부장적 가족제도에서 시댁 식구와의 갈등과 같은 첨예한 여성의 문제, 생활의 문제가 형부를 향한 처제의 설교와 형부의 잘해보겠다는 선언으로 봉합되어버리고 만다. 만화의 끝은 준후와 호선의 갈등 해결되는 것이다. 그것도 준후가 대기업의 아들이었다는 백마 탄 왕자류의 결론으로 끝이다. 호선이 'Beauty Space'에서 보낸 1년이라는 시간은 며느리 수업의 일환이 되어버린다. 이 어울리지 않는 허망한 결론으로 인해 본질적인 문제, 작가가 제기한 화두는 허공에 사라진다.

'Beauty Space'는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가 부족하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지점이 명확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했다. 잡지에 연재된다는 사실을 과도하게 의식했는지 무리하게 윤활유에 불과한 연애 에피소드에 힘을 실어 준다. 그 결과는 처절하다.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백마 탄 왕자라는 옷은 작품의 완성도에 치명적인 결격 사유를 가져왔다.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속내

김지윤의 'Beauty Space'는 독특한 작가만의 색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My Funny Baby'에서 출산의 고통을 묘사한 인상적인 장면처럼 'Beauty Space' 역시 솔직한 속내가 잘 드러나 보인다. 호선은 남자 친구 준후가 군대에 가자 언니 커피숍의 아르바이트 채민에게 추파를 던져본다. 심각하게 사랑하거나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로맨틱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멋진 남자에게 추파를 던진다. 시댁과의 갈등의 묘사도 현실적이다.

모든 것을 참아내고 자기 힘으로라도 잘 살아보려던 미선이 무너지는 순간은 어처구니없게도 시동생의 철없는 행동에서 촉발된다. 커피숍을 망하게 할 때도, 시누이의 대리점이 망해 빚을 떠안게 될 때도 냉정하게 참아내던 미선은 아이들의 과자를 빼앗아 먹고, 김밥을 먼저 먹어버리는 시동생의 행동에 분노를 터트린다. 우리의 분노가 얼마나 일상적인 지점에서 폭발하는가를 되돌아보면 이런 묘사는 빼어난 미덕이다.

다른 작품에서 일상의 순간 대신 머리에서 각색한 극적인 갈등이 등장한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김지윤의 작품이 지닌 혹은 김지윤이라는 작가가 지닌 일상성의 미덕은 폄하할 수 없는 매력적인 것이다. 'Beauty Space'는 그래서 안타까운 미완의 작품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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