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물·물을 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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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경제 상황과 주변 여건들이 어쩌면 3년 전 IMF 위기가 닥쳐올 때와 같은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더 큰 파도가 몰려오는 것 같아 벤처 기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무척이나 암울하고 안타깝다.지금 벤처 기업들은 ‘물을 달라’고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3년 전에는 한보와 기아가 무너지더니 지금은 한국에서 가장 큰 재벌들인 대우와 현대가 무너지고 있다. 3년 전에 망해서 매각이나 청산에 들어갔어야 할 기업들을 유례 없는 워크아웃 기업 리스트에 대량으로 집어넣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자금 수혈하면서 지금까지 끌어왔다.

수박 겉 핥기 식의 부실기업 퇴출이 얼마 전 발표되었으나 증권시장이나 외국 투자가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구조조정은 정치논리와 눈치보기에 바빠서 진전이 없고 현 정부의 개혁의지와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뒷심은 너무도 부족한 듯싶다.

금융기관들은 천문학적인 숫자의 부실덩어리 금융자산을 끌어안고 표류하면서 제2의 금융 구조조정 대상이 되지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정책당국의 눈치만 보고 있다. 또한, 금융기관들이 발표하는 영업 전략들 또한 참으로 가관이다. 모두 다 한결같이 소비자 금융만 중점으로 하겠다는 이야기다.

쉽게 말하면 기업에 대한 대출이나 투자는 자신이 없어서 안하고 일반 개인들의 가계자금이나 주택담보 대출 등만 하고 예금 받고 송금해주면서 서비스 수수료만 챙기겠다는 것이다.

일부 부도덕하고 몰지각한 벤처 투자자나 기업가들의 이야기가 확대 재생산되어 벤처 기업 전체에 대한 투자가 냉각되고 있다. 기술개발과 신사업 모델을 정열적으로 추진해오던 벤처 기업인들의 의욕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고름을 오래 둔다고 해서 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프지만 빨리 도려내고 새로운 살이 돋아 나도록 약을 바르고 치유해야 한다. 자생력 없고 전망 없는 대기업들은 과감히 그리고 신속하게 정리해야만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 대비한 미래형 벤처 산업을 적극 지원하고 육성해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벤처 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육성과 지원만이 오늘의 경제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시할 것이며 한국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3년 전 우리가 IMF 위기를 해결해 나갈 때 경제에 탄력을 불어 넣어주던 벤처 기업들이 다시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할 여유가 없다.

벤처 기업은 특성상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과 신기술 개발을 위하여 소규모로 시작한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돈이 필요하다. 장비도 사야 하고 사람도 더 필요하다. 시장에다 마케팅도 해야 하고 구체적인 수익모델을 구축하고 실현해 가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돈을 내놓고 지원하겠다는 사람들이 없다. 기관투자가들은 돈보따리를 풀지 않고 있고 특별한 대책이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기업들은 미래 사업의 사활이 달려 있는 문제라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전략적인 투자 및 제휴로 접근해 오고 있으나 요즘은 많이 몸을 사리고 있다. 제 코가 석 자인 이유도 있지만, 벤처 기업에 투자하거나 지원한다고 하면 변칙증여 및 상속이 아닌가 하고 철저한 세무조사에 들어가고, 언론에서는 난도질을 한다.

그 어느 누가 총대를 멜 것인가. 힘들게 구축해 놓은 벤처 기업의 성장잠재력이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다.

현재 벤처 기업들에게는 정부나 업계에서 내세우는 슬로건식, 혹은 선언적 의미의 지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지금 유망 벤처 기업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금이다. 자금을 풀어야 한다. 벤처 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분투자와 저리의 장기 융자가 필요하다.

정책당국은 복지부동하고 있는 금융기관들에게 유망 벤처 기업에 대한 투자와 대출을 의무화 해야 한다. 모두 다 소비자 금융만 하면 우리나라는 망한다. 살아남을 기업이 별로 없다. 또한, 채산성 없는 사업에 돈 쏟아 부으려는 대기업들, 혹은 신규 사업권을 따내고자 하는 대기업들에게 벤처 기업에 대한 자금지원과 기술개발, 마케팅, 해외시장 개척 지원 등을 의무화 해야 한다.

의무화가 어렵다면 혜택을 많이 주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정책당국의 적극적이고도 구체적인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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