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짧고 굵은 FTA는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9일째다. 미국 자동차와 와인은 FTA 발효와 함께 할인 판매에 들어갔다. 관세가 없어진 캘리포니아 와인은 수입가 10만원짜리가 2만원 정도 값이 내릴 여지가 생겼다. 5000만원에 수입된 차는 단번에 세금 부담이 400만원 줄었다. 미국 차 값이 내리니 독일·일본 차도 할인 경쟁에 나섰다. 진통 끝에 FTA를 발효시킨 정부가 바라던 그림대로다. 편익은 추상적이고, 피해는 구체적이었던 게 정부 FTA 홍보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변화가 나타났으니 반색할 만하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이벤트성 할인이 시들해지면 FTA 체감도는 뚝 떨어질 것이다. 관세와 무관하게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차 값은 오를 테고, 미국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수출이 눈에 띄게 늘긴 어렵다. 가격 하락으로 수요가 늘어나면 값을 다시 올리는 곳도 나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한·미 FTA는 실패한 것인가. 그렇진 않다. 애초부터 FTA는 하루 이틀에 결판이 나는 단기 프로젝트가 아니다. 문서로 된 협정이 살아 움직이는 경제 활동이 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관세 인하의 첫 수혜자가 된 수입 업체조차 “관세가 내리는 품목인지 몰랐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문제는 한·미 FTA와 정치 일정의 시차다. 총선·대선으로 숨이 가쁜 정치는 FTA에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진영을 나누는 준거로 이만큼 확실한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공방이 다시 가열될 때쯤이면 가능성만 놓고 논쟁했던 이전과 질이 다른 논쟁이 된다.

이미 현실이 됐으니 공방은 보다 직접적이고,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든 통계 숫자가 필요하다. “가정과 우려만으로 얘기하지 말라”고 대응해 온 터라 결과치에 대한 부담은 FTA를 추진한 쪽이 훨씬 크다. 정부가 국민 체감도를 높이기 위해 시장 원칙을 깨는 무리수를 둘까 걱정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여러 변수가 있는 소비자 가격을 수입가만으로 판단해 관리하겠다는 거친 정책이 이미 나왔다. ‘발효 6개월’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9월에는 밀어내기식 수출의 유혹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조급증은 시장을 왜곡하고 FTA 효과마저 갉아먹는 부작용을 만들기 마련이다.

 반대하는 야권도 FTA에 시간을 줘야 한다. 야권이 대표적 독소조항으로 꼽아온 투자자·국가 소송(ISD)이 대선 전까지 한 건도 없다고 해서 ISD가 독소조항이 아니라고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점에서 학계 일각에서 제기된 ‘FTA 휴전론’을 대선 주자들이 검토해 봄직하다. 적어도 3년은 기다려보고 그때 가서 효과 검증을 하자는 제안이다. 휴전 종료 시기는 다음 정부 임기의 중반쯤이니 어떤 결론이 나던 집권 세력이 결과를 현실에 반영할 시간은 충분하다. 좋든 싫든 분명한 것은 몇 개월 안에 결판이 나는 짧고 굵은 FTA는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