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출신 두 작가, 나란히 새 소설

중앙일보

입력

입 심 세기로 소문 난 강원도 강릉 출신 두 소설가가 나란히 소설을 펴냈다.

1988년 '문학사상' 으로 등단,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 무늬〉등을 펴내며 주제.소재 가리지않고 폭넓게 작품활동을 하고있는 이순원(43)씨는 장편 〈첫사랑〉(세계사 간), 90년 '세계의 문학' 으로 데뷔한 후 소설집 〈묵호를 아는가〉로 주목 받았던 마르시아스 심(40)은 연작소설집 〈떨림〉(문학동네)을 최근 펴냈다.

둘 다 그들이 나고 자라고 젊음의 방황을 한 대관령 너머의 산골과 동해를 작품의 무대로 삼고 있지만 고향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중년에 접어든 이씨는 순수와 첫사랑의 고향으로, 심씨는 아무 뜻 없고 죄 없는 일회성 섹스의 원천으로서 그 고향을 입담 좋게 이야기해나가고 있다.

선후배 가릴것 없이 문단 술자리에서 심씨는 그 재기발랄한 이야기로 좌중을 압도한다. 소설 잘 쓰는 선배들도 '저 친구는 어떻게 저리 재미 있는 이야기가 마냥 샘솟을 수 있을까' 고 부러움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8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떨림〉은 바로 그런 술자리에서 8일 밤 동안 들려준 이야기로 그대로 읽힐 수 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란 명분으로 '심상대' 란 본명을 '마르시아스 심' 으로 바꿨다고 하지만 실은 이 재밌고 야한 이야기를 하기위해 바꿨는지도 모른다.

작가 자신인듯한 40에 이른 소설가 주인공이 고교 시절부터 술집 종업원.뱃꾼등의 신산한 젊음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대한 무수한 여자들과의 섹스의 떨리는 순간들이 '떨림' 을 꿰고 있다.

"문고본 책갈피에 그동안 나와 사랑을 나누었던 여자들의 몸에서 하나하나 훔친 불꽃털을 고스란히 모아두었듯이 내 소설 속에 그 여자들과 나누었던 사랑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모아두려했던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은 다들 순백의 영혼을 지녔고, 그리고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성기를 저마다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미로운 언어의 선율에 실어 노래하고 싶었다. "

작품 앞부분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 고백이 이 작품이 어떤 소설이라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좋은 이야기꾼이 그렇듯 작가는 작중 주인공이 되고, 또 이야기 진행자.해설자가 되기도 하고 상황 묘사꾼이 되기도 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마당을 공개하고 있다.

즉 소설을 활자가 아닌 이야기가 구연되는 그 공간으로 돌려놓으며 마치 작가와 독자가 화롯가에 같이 앉은 효과를 준다.

두 자매의 처녀성을 대수롭지 않게 딸기 따먹듯 한 섹스에서 시작해 연상의 하숙집 아줌마와 술집 마담과의 탐닉을 위한 섹스, 절름발이 처녀.미친 여자.도저히 여성적이라 할 수 없는 여자들과의 섹스, 그리고 자신이 주례를 서주기로 약속했던 처녀와의 섹스 등 섹스가 섹스를 물고 펼쳐지고 있다.

끊임없이 그 떨림의 순간을 전하면서도 의미를 띠려는 순간 항상 이야기는 차단된다. 해서 그 섹스들은 떨림의 순간일뿐 어떤 욕망이나 의미도 가질 수 없는 허망함 그 자체임을 드러내고 있다.

〈떨림〉이 고향과 가족이란 공동체가 파괴되고 정보화로 인해 신유목 사회, 사이버 사회에 접어든 삶의 한 양태를 섹스를 통해서 드러낸다면 이씨의 〈첫사랑〉은 우리가 파괴한 고향으로의 회귀다.

〈첫사랑〉은 사회가 아무리 변했어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관령 바로 아래 '가랑잎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30여년만에 동창 모임을 갖는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가장 가난한 시절인 50년대 태어나 굶주림 속에서 배우고 오늘을 일궈내 지탱하고 있으면서도 앞뒤 세대에 끼여 주장 한번 제대로 못하고 사는 낀 세대들이 가난했지만 인정 있고 예의 발랐던 옛날이 좋다며 그 첫사랑의 고향을 회고하는 이야기다.

그 때 그 고향에서 첫사랑의 남녀는 서로 말 한번 못건네고 먼발치에서 상대방의 안녕만을 빌었었다.

같은 고향, 엇비슷한 나이와 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 이씨의 〈첫사랑〉과 심씨의 〈떨림〉은 이렇게 차이가 난다.

부끄러워, 상대방에 누가 될까봐 고백도 못하는 첫사랑과 외로운 들개마냥 만나면 단숨에 합치된 본질에 다가서려는 섹스에의 탐닉이라는 사랑의 두 양태, 나아가 삶의 두 방식을 두 작가가 대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