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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의 금요일 새벽 4시] “이거, 그냥 보리차인데 … ”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4면

◆요넥스코리아 김덕인 회장을 만나 놀랐던 건 단지 나이만이 아니었습니다. 아흔두 살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억력도 또렷했습니다. 무슨 답을 할 때마다 연도와 이름, 장소까지 일일이 언급했으니까요. 그러니 장수 비결,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이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사무실을 둘러보며 눈을 번뜩였습니다. 물론 인터뷰에서 물어보긴 했죠. 규칙적인 생활, 소식, 정직한 마음…. 에이, 그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정답 아닙니까. 그런데 드디어 뭔가 발견했습니다! 인터뷰 내내 회장님이 홀짝이듯 마시던 정체 모를 차(茶)였습니다. 작은 보온병에서 조금씩 따라 아주 천천히 음미하듯 드시더라고요. 결명자차? 보이차? 아니면 들어보지도 못한 중국의 귀한 차? 다른 화제가 오가는 동안에도 머리 한구석에 궁금증은 더 커져갑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더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회장님, 드시는 게 참 귀해 보이는데…. 아니, 제가 먹으려는 건 아니고요. 저희 아버지도 연세가 높으셔서…(주절주절).” “아, 이거요? 그냥 보리차예요, 보리차. 실내가 건조해서 자꾸 목이 마르네.” “….” <이도은>

◆캠퍼의 CEO 미구엘 플룩사를 인터뷰하고 난 뒤, 그의 아버지 로렌조 플룩사 회장과 잠시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로렌조 플룩사 회장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1870년대에 신발공장을 만들면서 시작된 가업을 ‘캠퍼’라는 브랜드로 재탄생시킨 인물입니다. 잠깐 대화를 나눴을 뿐이지만 역시나 비범한 ‘포스’가 느껴졌습니다. 하는 말들이 퍽 인상적이어서 기회가 있다면 그의 인터뷰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중에 한 대목은 일종의 자기소개였습니다. 대뜸 이러는 겁니다. “나는 보스가 아닙니다. 보스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여전히 ‘회장’ 직함을 지니고 있죠. 그러니 이 말은,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얘기인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이 이뤄온 것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언제 나도 이런 식의 멘트를 자신 있게 날려볼 수 있을까요. 그가 한 말을 마음속으로 한번 따라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나는 보스가 아닙니다. 보스의 아버지입니다”라고요. 앗, 여기까지 적고 보니 제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장담컨대 제게는 이런 멘트를 할 기회가 결코 없을 것 같네요. 왜냐하면…전 여자거든요. <이후남>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곤혹스러운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서울대병원 종양내과센터장 허대석 교수님을 만났을 때였죠. 오전에 잡힌 인터뷰인 만큼 상쾌한 기분으로 교수님과 마주 앉았죠. 네, 여기까지는 아주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말기 암환자들 얘기가 가벼울 리 없습니다. 그래도 기자로서 이 정도 얘기를 어디 한두 번 들었겠습니까. 네, 여기까지도 괜찮았습니다. 문제는 강아지를 키우는 게 소원이었던 백혈병 소년, 그 아이와 작별을 준비해야 했던 부모님 얘기를 듣는 순간이었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툭툭 떨어지는 게 아닙니까. 속으로 ‘아이쿠’를 연발했습니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 말이죠. 냉철한 기자는 눈물을 보여선 안 되는데…. 이런 건 티 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들어 눈물을 닦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가족과 작별을 준비하는 가장의 이야기…. 아이쿠, 아이쿠…. 아, 그때 (눈물) 참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혹시 눈물 많아진 게 무슨 병은 아닐까 걱정도 됐죠. 그런데 취재 마치고 나오는 길에 사진기자 박종근씨가 한마디 합니다. “아휴~ 저 입술 터졌어요, 눈물 참느라고 너무 세게 깨물었나봐요.” 휴우~ 다행입니다. 나 혼자만 그랬던 건 아닌가 봅니다. 냉철한 기자로 보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최소한 제가 눈물병에 걸린 것은 아닌 거 같으니까요. <이은주>

j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신문 ‘제이’ 87호

팀장 : 이은주
취재 : 백성호 · 이도은 · 이소아 기자
사진 : 박종근 차장
편집·디자인 : 이세영 · 김호준 기자 , 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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