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마르크스의 부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배영대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화요일 오전 사무실 책상에 배달된 한 권의 책에 눈길이 멈췄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마르크스(1818~83) 사후 그의 사회주의 동지였던 엥겔스가 1884년 펴낸 책으로, 마르크스 유물론을 대표하는 원전 가운데 하나다. 국내에는 1989년 아침출판사에서 번역돼 나왔다가 절판됐는데 이번에 새 단장을 하고 두레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것이다. 여기에 눈길이 머무른 이유는 이 책을 집에서 처분하던 10여 년 전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90년대 후반께다. 살던 집을 옮기면서 집안의 책을 정리할 때였는데 버릴 목록 중에 이 책도 섞여 있었다. 언제 또 보겠어?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다.

 한동안 잘 안 보이던 마르크스 관련 책이 요즘 부쩍 눈에 띈다. 『마르크스의 용어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마르크스 사용설명서』 『맑스 사전』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이론』 등등 최근 몇 개월 새 나온 책 제목이다. 조금 앞서 나온 『데이비드 하비의 막스 자본 강의』 『마르크스의 가치론』 『엥겔스 평전』 『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등도 뺄 수 없겠다. 대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번역됐는데 최근 더 두드러진다. 경제위기로 삶이 팍팍해지면서 자본주의 분석과 비판의 주인공으로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는 양상이다. 어린이용 『만화 마르크스 자본론』『역사와 논술을 확실하게 잡아주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같은 책도 보인다.

 마르크스를 직접 제목에 노출시키지 않은 책까지 포함하면 그 분량은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반대 시위 이후 더욱 심화되는 것 같다. ‘마르크스 르네상스’라 할 만하다. 마르크스의 대표작 『자본』을 새로 완역해 낸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묘비명 뒤로 사라졌던 마르크스가 다시 무덤에서 살아나왔다. 마르크스 책이 금서(禁書)였던 시절인 87년에도 『자본』이 출간된 적 있다. 그 일로 출판사 대표가 구속까지 당했던 당시와 비교하면 세상 많이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박치우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한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이란 책이 지난달 말 출간된 것도 이 같은 흐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수요가 있고 흥행이 예상되니까 공급도 잇따르는 것이리라. 70~80년대처럼 비판이론 유통 자체를 억누를 순 없는 시대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냈던 1867년의 19세기 자본주의와 오늘의 21세기 자본주의를 동일하게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우려는 제기할 수 있겠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흐릿해진 관심을 되살아나게 하는 토양이 아닐까.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되새겨볼 만한 지적을 해놓았다.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이 마르크스를 다시 부활시키고 있다. 가진 자, 배운 자들의 탐욕이 그 온상이다”(『자유의 적들』)라고 했다. 출판계에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바람의 강도가 얼마나 더 세질지 주목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