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자유, 고암 이응로의 '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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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작.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림 한 점을 마주한다. 그림을 남기고 화가는 훌쩍 떠났다. 이제 육신으로는 만날 수 없는 화가의 내면이 소품으로 남아 반긴다. 화가는 사랑하던 사람들의 슬픔을 뒤로 한 채 이승에서의 고단한 삶을 접었다.

유작으로 추정되는 그림을 응시하면서 그의 숨결이라도 느껴 볼 요량으로 유작을 애무한다. 촉각은 시각보다 많은 것을 전달하지 않던가. 신음소리가 들릴 듯. 붓이 휘이익 스칠 듯. 손 끝에 아련한 것이 전달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필 1988년 12월 31일 작품이라니. 1988년의 마지막 밤을 그는 어떻게 보냈을까. 한 해의 끝. 생의 일몰. 그림은 세월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자신의 모습을 담았던 것은 아닐까. 그가 감내해야만 했던 근·현대사의 질곡이 고통스러운 필세로 이렇게 남았다.

인동초, 고암 리응노(顧菴 李應魯).

유작은〈군상―1988년을 보내면서 12. 31 리응노 작〉이라는 긴 부제를 담고 있다. 그가 한많은 생을 접은 것이 1989년이고 이 작품 이후의 작품이 구체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필시 유작일 터. 왠지 작은 작품에 많은 말을 담으려 했던 것이 범상치 않으며, 웅장한 군상 연작과는 달리 유독 인간의 내면을 작은 화폭에 압축적으로 '클로즈 업' 한 것이 또한 의외다. 불운한 그의 생애가 극적으로 조명된다. 유언같다.

지난 1989년 호암갤러리에서의 대규모 회고전이 기억난다. 회고전에 맞추어 망명지인 파리에서 고향 조국으로 귀국하겠다고 약속했던 그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며 유언이 될 줄이야. 당시 회고전에 던져진 그의 부음은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가슴을 찢고 가슴에 피어린 상흔을 남겼다. 낭자한 피. 사람들 사이에서 피냄새가 진동했다. 살냄새, 피비린내. 어떤 위로의 말도 수용할 수 없었다. 통절한 회고전. 전시장에는 곧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부인 박인경씨는 고암의 당시 모습을, "1989년 1월 이응노 전시회가 12년만에 고국서 열리게 됐어요. 그 분은 병원에 입원해 계셨지만 그래서 기분이 무척 좋았던 것 같아요. 아들 융세보고 '넌 그 길(그림)로만 가라. (붓을) 들고 일만 하면 된다'고 특유의 충청도 사투리로 말하고, 제게 '집에 가서 밥먹어라'라고 했죠. 그게 유언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비보가 날아들었죠."라고 회고한 바 있다.

아내와 자식을 향해 끝내 '그림(예술)'과 '밥(현실)'을 유언으로 남긴 고암. '밥'과 '그림', 즉 예술과 현실이 갖는 함축적 의미 때문에, 또한 그것이 죽음을 마주한 마지막 말이 되었다는 극적인 정황 탓에 슬픔은 고조되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1967년 '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2년 반 동안 혹독한 옥고를 치르고 남한에서 금기작가로 낙인당했으나, 그의 창작열기는 결코 종식되지 않았다. 그는 세계의 무대에서 자신의 예술혼을 불살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서로 위안하길, 정치적 한파와 현실정치의 파행 속에서 마침내 고단한 삶이 종식되고 안식을 맞았다고, 드디어 속세의 인연을 접었다고 자위했다. 오히려 그가 남긴 그림은 형형하게 빛을 발하며 전시장을 감동의 물결로 뒤덮었다. 호소하고 춤추며, 달려가고 포옹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그는 총총히 사라졌지만.

다시 유작. 유작은 인간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60년대부터 시작된 인간 연작은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본격화되었다. 연작은 60년대의 사의성 강한 추상적인 인간에서, 문자와 인간이 결합하며 조형성이 부각된 70년대의 인간상으로, 마침내 인간이 기호화되는 80년대의 인간상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80년대의 기호화가 사물화는 아니다. 그의 기호화는 익명성의 표현이며, 민족의식을 각인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추상성은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 항쟁 이후 구상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화폭에서 하늘을 향해 두손을 쳐들고 뛰어가는 듯, 혹은 춤을 추는 듯, 환희인 듯 절규인 듯 저항을 온몸으로 연출하는 인간의 형상이 눈물겹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선 알 수 없는 희망과 자유, 절망과 좌절, 분노와 고통이 함께 한다. 그것은 생명력의 역동적 분출같기도 하며 억압구조를 타파하고 자유를 향한 대규모 저항 같기도 하다. 화가는 인간 그 자체. 즉 군중의 익명성이 보편적인 의미로 승화할 수 있다는, 혹은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관심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고자 했다.

그에게 춤은 그것이 반핵운동이든, 독재에 대한 항거이든 통일에 대한 염원이든 간에 인간의 건강한 삶을 저해하고 억압하는 모든 세력들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다. 자유의 춤이, 끝내 분단모순을 극복하고 통일의 춤으로 심화되고 확장되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실제로 그는 1981년에 제작된 한 작품에서 남과 북의 인물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그림을 [통일무-우리가 살길은 조국통일 뿐]이라고 명칭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통일의 춤을 추지 못하고 고난의 생을 접었으니, 그는 저승에서도 이를 통탄했으리라. 대담하고 장대하게 화폭에 전개된 그 동안의 인간군상에 비해 6명의 인간으로 단출해진 유작이 이를 증거한다. 비록 인간의 형상은 화면에 크게 부각되어서 화면을 압도하는 힘은 여전해도 그림에 미묘한 슬픔이 녹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하늘을 향해 절망을 토해내는 듯한 고통의 몸짓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거침없는 붓질은 부드럽고 여리며, 선적(線的)이기보다 면적(面的)인 따뜻함으로 변모해 있다. 슬픔마저 감싸안으려는 이를 통해서 화해와 평화를 기원하는 관용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신들린 격정이 녹아있는 서정적인 긴장과 힘에서 그의 탁월한 예술혼을 만나게 된다. 그의 화폭에서 인간 기호는 거대한 영혼으로 살아난다. 그가 지금 생존해서 남·북의 화해의 분위기와 통일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면 어떤 감회에 젖을까 궁금해진다.

조용훈 (yhcho@sugok.chongju-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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