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한 해군 장교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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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강영진
논설위원

그제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현장을 다녀왔다. 해군 정훈공보실의 주선으로 간 길이었다. 지난해 여름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해 갔을 땐 시위가 격렬해 모든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현장 진입을 막는 시위대에 막혀 담장만 둘러쳐져 있는 공사 구역 안쪽은 돌아볼 수 없었다. 기지사업단 사무실 앞에 설치된 전망대에서 설명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이번엔 그런 일은 없었다. 강정마을 곳곳에 반대구호가 적힌 현수막은 그대로였다. 현장 관계자는 매일 공사 현장 진입로에서 반대 집회가 열린다고 알려줬지만 시위대와 마주치진 않았다. 구럼비 해안 현장엔 배수로 등이 이미 설치됐고 방파제와 부두 건설에 필요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가득했다. 40t짜리 삼발이와 80t 딤플 수백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포클레인도 땅을 고르는 등 공사가 제법 이뤄진 모습이었다.

 이런 정도라면 공사가 다시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왜 해군은 또 현장 방문을 주선했을까, 오히려 의아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현장 관계자들이 느끼는 조바심은 국외자의 한가한 느낌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15만t 크루즈 관광선 2척의 동시 입항 능력을 둘러싸고 최근 벌어진 논란을 해명하는 해군 관계자는 절박해 보였다. 조감도를 보면서 설명을 들으니 논란이 오해에서 비롯됐음은 금세 알 만했다.

 최근 반대론자들이 들고나온 시비는 ‘15만t급 크루즈 관광선 2척이 동시에 정박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설명을 들어보면 현 설계로도 관광선이 정박하기에 문제도 없거니와, 오히려 그런 시설이 왜 필요한지 의문이 들 정도다. 민(民)과 군(軍)이 함께 사용해야 하는 시설이라 필요하다지만, 15만t급 크루즈 관광선은 전 세계에 7척밖에 없고 우리나라엔 한번 나타난 적도 없다. 이 문제가 빌미가 돼 항만 공사에 지장을 받을 일은 결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이명박 대통령이 제주기지 건설 중단을 공약한 야당을 비판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야당이 발끈했다는 소식도 이어졌다. 해군 관계자들의 조바심이 다시 떠올랐다.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기지 건설이 중단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그들로선 당연했다.

 순간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군이 무슨 잘못이 있나. 역대 정부가 십수년 넘는 시간이 걸려 검토한 끝에 건설이 시작된 기지공사 아닌가. 그것도 현 정부가 아닌 지난 정부에서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일이었다. 물론 안보 전략상 필요성을 제기한 것도 해군이요 공사를 책임지는 것도 해군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해군이 국익 아닌 사익을 챙기려고 일을 벌인 것은 아니지 않나.

 전날 저녁 제주항 근처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인 일이 생각났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기지 건설사업단에 오래 근무했다는 한 해군 장교는 자괴감을 드러냈다. “군인인 내가 왜 정치판에 휩쓸려야 합니까.” 다른 장교는 눈물까지 비쳤다.

 50대의 군인들이 초면의 필자 앞에서 쉽사리 보일 수 없는 몸부림들이었다. 면전에서 응대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술김에 나온 치기 어린 행동으로 치부하기엔 안타깝다는 느낌이 컸다. 귀경하는 길 내내 그 느낌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찜찜했다.

 ‘평화의 섬 제주’라는 말이 왜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안 되는 이유로 꼽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계 7대 자연 경관’으로 꼽힌 아름다운 제주에 군 시설이 들어서는 것 자체가 평화를 깨뜨리는 일일까. 그리 단순하진 않을 것이다. 대규모 군항이 자리 잡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어디 한두 곳인가.

 중국을 비롯한 인접국들이 유사시 제주 해군기지를 공격 목표로 삼을 가능성이 커진다고. 그럼 본토가 다른 나라 공격을 당해 불바다가 됐을 때 제주는 온전히 남아 있을까. 제주 기지가 미 군함의 모항으로 이용돼 중국의 반발을 불러온다고. 그게 우리 항구지 미군 항구인가. 대한민국이 미국 식민지라도 된단 말인가.

 정치판의 복잡한 계산을 낱낱이 따라잡긴 역부족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지금 제주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판의 이전투구(泥田鬪狗)는 군인들의 사기를 바닥 모르게 추락시키고 있다고. 또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답답함과 좌절감만 줄 뿐이라고. 정치인들이 국민의 마음까지 염려해 진중하게 처신하길 기대하는 건 정말 안 되는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