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항상 밝을 순 없겠지...그래도 어쩌겠어 ‘행진’해야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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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호 17면

서태지 1집과 조용필 7집. 사진 가요114 제공

시간은 흘러가고, 그 시간에 따라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길 위에 떠밀린다.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인생길 위에서 자기 의지대로 멈출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결코 시간이 멈추어질 순 없다”고 선언한 지도 올해로 꼭 2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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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시간이 멈추어 줄 순 없다, 요! 무엇을 망설이게 되는 것은 단지 하나뿐인데/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 환상 속엔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후렴)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그것뿐인가 그대가 바라는 그것은 아무도 그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나 둘 셋 Let’s go! 그대는 새로워야 한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고 새롭게 도전하자/ 그대의 환상 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 그 마음은 위험하다/ 자신은 오직 꼭 잘될 거라고 큰소리로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대가 살고 있는 모습은 무엇일까/ (후렴) // 세상은, 요! 빨리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 한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후렴).”(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 1992, 서태지 작사·작곡)

20년 전 서태지와 아이들은 전주부에서 뎅뎅 종소리를 울리며 이 엄청난 말들을 쏟아놓았다. 김민기가 ‘길’을 노래한 것이 만 스물이었는데 서태지도 이 해에 만 스물이었다. 그때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충격이었다. 지금 들어봐도 몇몇 구절은 절창이다.

하지만 역시 스무 살짜리의 말이다. 스무 살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윤동주의 ‘서시’), “여러 갈래 길 가다 못 갈 길 죽기 전에라도”(김민기의 ‘길’) 같은 엄청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의미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짐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다니! 세상에, 그게 인간에게 가능하기나 한가. ‘환상 속의 그대’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에 대한 환상과 착각을 깨라고 얼음물을 확 끼얹는 듯한 과감함은, 나이 든 사람은 감히 보여주기 힘들다.

이 노래는 청소년들이 나름 패기만만할 수 있었던 시대의 소산이었다. 이 시대에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향해 가면서 ‘세계화’의 분홍빛 꿈에 젖어 있지만, 그로부터 20년 이후 우리가 모두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노래의 가사처럼, 자신을 직시하고 새로워지면 그래도 뭔가 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던 시대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 노래를 들으면 위로는커녕 불안감만 커진다. 내가 이렇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잘될 거야” 하며 가까스로 자기를 추스르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내 머리 위로 뛰어다닌다고? 그래서? 나더러 더 이상 뭘 어쩌라고!

냉철할 수 있는 것도 아직 기운이 있을 때 가능한 거다. 이보다 더 힘든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행진’이 더 위로가 된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내가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후렴) / 행진 행진 행진하는 거야/ 행진 행진 행진하는 거야// 나의 미래는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 나의 미래는 때로는 힘이 들겠지/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 (후렴) // 난 노래할 거야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후렴).”(들국화의 ‘행진’, 1985, 전인권 작사·작곡)

끝도 없이 펼쳐진 뜨겁고 건조한 아스팔트 길을, 반쯤 남은 물병 하나만 달랑 믿고 떠밀리듯 걸어가는 느낌이랄까.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더 나아진다는 전망도 없다. 어둡고 힘든 과거를 겨우 버텨왔지만 미래도 고생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저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으니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뿌뿌 나팔소리에 맞춰진 전인권의 목소리로 “행진 행진” 하며 반복하는 후렴은 결코 낙관할 수 없는 길을 가야 하는 복잡한 심사를 고스란히 형상화한다.

들국화가 1985년 이 음반으로 한국 록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던 때, 수퍼스타 조용필도 길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상략) 여기 길 떠나는 저기 방황하는 사람아/ 우린 모두 같이 떠나가고 있구나/ 끝없이 시작된 방랑 속에서/ 어제도 오늘도 나는 울었네/ 어제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조용필의 ‘어제 오늘 그리고’ 1절, 1985, 하지영 작사, 조용필 작곡)
들국화든, 조용필이든 이 방황하는 길이 ‘혼자’가 아니라고 노래하니 그래도 다소 위안이 된다. 혼자가 아니니 어제와 오늘 인생길의 잃은 것과 남은 것을 함께 따져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 대중가요 관련 저서로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광화문 연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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