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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我記宅處’] 마당 깊은 집, 그 진정한 비움의 아름다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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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의 료안지(龍安寺) 마당

일본 교토 료안지의 정원.

1998년 북런던대학교의 객원교수로 머물고 있었을 때 동료 교수들과 세미나를 열 때면 심심치 않게 듣는 단어가 있었다. “indeterminate emptiness”, 우리말로 하면 “불확정적 비움”일 게다. 확정되지 않은 비움이라니… 도무지 내가 아는 그들의 단어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새 시대 새로운 가치라며 열변으로 주장하곤 했다. 그러는 그들이 돌려가며 보는 사진이 있었는데 바로 일본 교토에 있는 료안지(龍安寺)라는 절의 마당이다. 15세기에 선종 불교의 계열로 세워진 이 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인 교토에 있는 모든 역사적 건축 중에서도 가장 서양인들을 매료시킨 건축일 게다. 나에게도 그렇지만, 관점은 그들과 대단히 다르다.

 료안지를 처음 간 게 92년이었다. 교토의 현대건축 몇을 둘러본 후 다소 시간이 남아서였다. 녹음 짙은 숲의 깊은 향을 맡으며 이 절의 현관에 다다랐는데 신발을 벗어야 된다고 했다. ‘오유족지(吾唯足知)’라는 글이 새겨진 다실 앞 돌판을 보고 그렇지 않아도 이미 다소곳해졌던 터였다. ‘나는 오직 족함을 알 뿐이다’이니, 다 버리라고 했다. 결국 신발주머니에 신을 넣고 들어섰는데 긴 마루가 깔려 있고 그 왼편 너머에 펼쳐진 마당, 완벽히 다른 세계가 있었다. 마루에는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모두 마치 숨소리를 죽이고 눈을 감고 이 마당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곤 한없는 침묵…. 나는 그냥 과제 삼아 들렀건만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정적 속으로 길게 들어가고 말았다. 한참을 지나니 바깥이 보였다. 30m 가까운 길이의 마당을 낮은 황토 담장으로 둘러싸고 열다섯의 작은 돌덩이들이 기암괴석의 표정을 취하며 적절한 거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백색의 쇄석은 쓸어내린 결에 따라 정갈한 무늬를 이루었다. 정교함, 치밀함, 절제함, 지극함 그리고 숨막히는 아름다움…. 모든 것은 정지돼 억만년의 세월이 화석화된 것처럼 보였다. 고요는 그 세월만큼이나 큰 크기였고, 아름다움은 그래서 비장했다. 그러나 의문. 이게 과연 비움일까? 더구나 불확정적 비움이라니.

“료안지는 시각적 미학 일 뿐”

 런던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2000년. 베니스 비엔날레는 21세기 새로운 가치를 찾으며 ‘덜 미학적인 것이 더 윤리적이다’라는 주제를 내걸었는데, 나와 함께 초대받은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한스홀라인이 바로 이 료안지의 마당을 그대로 축소한 모형을 출품했다.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같은 세련된 포스트모던 건축을 선보이며 세계 최고의 거장 반열에서 창조적 작풍을 번득이는 건축가였지만, 모두가 숨죽이고 기대한 그의 장소에 그는 윤리의 건축을 서구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조소와 함께 료안지를 윤리의 상징처럼 내세운 것이다. ‘도무스’ 잡지의 특집 표지에 등장한 이 작품으로 료안지는 급기야 윤리적 건축이 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달랐다. 미학에서 윤리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자는 것이라면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전개되는 삶을 들추자는 것인데, 내가 본 료안지는 시각적 미학일 뿐 그 속에 윤리는 부재했으며, 그게 비움이라면 확정되고 동결된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피란 나온 일곱 가구가 깊은 마당을 두고 모여 사는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산의 구덕산 기슭 밑에 지어진 그 마당 깊은 집의 풍경은 지금도 내 가슴에 뚜렷한 비움의 이야기다. 화장실과 우물이 하나씩 있는 길다란 마당의 아침은 매일 북새통이었고, 해질녘엔 저녁 짓는 냄새와 웃음이 마당을 늘 메웠으며, 곧잘 비워진 마당은 햇살과 빗줄기를 시시때때로 받았다. 그게 하이데커가 이야기한 거주의 아름다움이며 우리 존재 자체라는 것을 나이들어서야 알았다.

마당을 잃고, 비움의 아름다움도 잃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선조들이 일군 모든 집의 마당들이 그런 아름다움을 가졌었다. 그 마당은 대개는 비어 있지만 언제든지 삶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어린이들이 놀든, 잔치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든 그 공간은 늘 관대하게 우리 공동체의 삶을 받아들였고 그 행위가 끝나면 다시 비움이 되어 우리를 사유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게 불확정적 비움이었고,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우리에게 전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을 버리고 서양의 미학을 좇으며 마당을 없앤 지금의 우린데, 서양인들은 그게 궁극적 아름다움이라고 다시 우리 선조의 마당을 찾으니, 이 황망함을 어떻게 하나.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 나는 마당 깊은 집의 그 깊은 안마당을 화물 트럭에 싣고 온 새 흙으로 채우는 공사 현장을 목격했다. 내 대구 생활 첫 일 년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나는 슬픔 가득 찬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굶주림과 설움이 그렇게 묻혀 내 눈에 자취를 남기지 않게 된 게 달가웠으나, 곧 이층 양옥집이 초라한 내 생활의 발자취를 딛듯 그 땅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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