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총 들고 한국 관광객 4명 납치 필리핀 괴한 10명 잡고보니 경찰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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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필리핀 관광에 나섰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현지 경찰관들에게 납치됐다가 몸값을 주고 풀려난 사실이 드러났다. 필리핀 경찰들은 관광객들에게 마약소지 혐의를 뒤집어 씌워 체포한 뒤 무마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수법을 썼다.

 16일 충남경찰청 등에 따르면 충남 성환읍 주민 13 명은 지난 11일 3박4일 일정으로 필리핀 마닐라로 여행을 떠났다. 골프 등을 즐기며 친목을 다지기 위한 행사였다.

 이들 중 김모(45)씨 등 4명은 14일 오전 10시쯤 한국인 가이드 최모(33)씨의 안내로 숙소 인근 쇼핑센터를 찾았다. 이날 오후 2 시 귀국 비행기를 탈 예정으로 기념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쇼핑센터 안에 서 있는데 갑자기 권총을 든 사복 차림의 남성 10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김씨 일행에게 수갑을 채우고는 마닐라 경찰서 옆 컨테이너 박스로 끌고 갔다. 납치범 중 한 명은 김씨 등이 메고 있던 가방에 흰색봉지를 밀어넣고는 “경찰이다. 마약소지 혐의로 체포한다”고 소리쳤다. 김씨는 “컨테이너 창문 밖으로 경찰 복장을 한 사람들이 오가고 벽에 현상수배범 사진도 걸려 있었다”고 전했다.

 김씨 등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톰’이라고 불리는 한국인 50대 남자를 만났다. 그는 김씨 등에게 “마리화나 소지로 붙잡히면 몇 년은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며 “3000만원을 주면 좋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 등 일행 4명은 하는 수 없이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해 톰이 알려준 계좌로 1인당 600만원씩을 송금했다. 가이드 최씨는 돈을 내지 않았다. 납치범들은 입금 사실을 확인하고는 김씨 등을 풀어줬다. 납치 9시간 만이었다.

 김씨 일행과 가이드 최씨는 다음 날 오후 9시쯤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 천안서북경찰서는 외교통상부를 통해 필리핀 당국에 납치 사실을 통보하고 “납치범들이 경찰인 것 같다”며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 관계자는 “필리핀 경찰이 즉각 수사에 나서 납치에 가담한 마닐라 경찰서 소속 경찰관 10명을 체포했다”며 “또 사건 무마대가로 돈을 요구했던 톰이란 남자도 검거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경찰은 가이드 최씨가 납치범들과 함께 범행을 모의했는지 여부도 조사하고 있다. 납치됐던 김씨 일행이 최씨가 쇼핑센터에서 특정 장소에만 머물게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특정 여행사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관광가이드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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