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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의 반대는 이성애일 뿐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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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의 어느 지점까지 우리의 지성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 가운데 미쉘 푸코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최고의 수재들이 다닌다는 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엘리트입니다. 그런 그가 학생이었던 청년 시절에 몇 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기야 하겠지만, 가장 우선적인 것은 그가 동성애(同性愛)자였기 때문입니다.

1926년 생이라 4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으니, 이미 반세기도 더 전에 동성애에 대한 대중들의 시선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니 한 나라 최고의 수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워 자살을 꿈꾸었던 것이죠.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살아났고, 오히려 그 이질성의 체험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 나갑니다. 정상/비정상의 구분과 배제라는 것이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통찰이죠. (여기에 대해서는 지금 이 사이트의 '고전 읽기'에서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대한 남경태 선생님의 칼럼이 참고될 것입니다.)

실제로 서양문화의 한 근원인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가 상당히 일반적인 현상이었답니다. 그런데 어떤 시대에 와서 그 일반적인 것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배제하며 자신의 권력을 관철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죠. 세상의 모든 일들에는 이런 권력의 개입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입는 옷이나 사용하는 언어에도 권력은 개입합니다.

프랑스에서도 60년대 후반까지 여학생들은 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치마의 세계 안에, 그러니까 조신함과 수동성 속에다 여성들을 묶어두는 것이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하면 총격에 희생된 사람들만 있어도 '양민 학살'이 되지만, 공중에서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뿌린 미군의 행위는 '공중 공격'이라는 용어로 완화됩니다. 이것이 권력입니다.

미쉘 푸코는 이런 권력의 속성에 대한 통찰을 밀고 나가 나중에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학자들의 최고의 영예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구요. 그가 죽은 뒤에 간행된〈말해진 것과 쓰여진 것〉이란 유고 저서에서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당신의 합법적인 이질성을 키워나가세요" 라는 문구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낯선 것, 이질적인 것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아주 배타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배제되는 사람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생각하면 잔인한 일이죠. 산업 연수생으로 들어와 온갖 구박을 견뎌야 하는 외국인들, 폭력으로 비화되는 청소년들의 왕따 현상, 이런 것들이 결국 나찌즘의 유태인 학살을 만들어낸 인간 존재 속의 '악'입니다. 이질성, 즉 다름이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합법적인 것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푸코 못지 않게 우리의 문학적 지성에 영향을 미친 프랑스 학자가 롤랑 바르트입니다. 그도 푸코와 거의 같은 시대에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고, 그의 많은 책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애독서로 프랑스 서점의 서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동문선이란 출판사에서 그의 전집을 번역 출간하고 있습니다. 〈텍스트의 즐거움〉등등 이미 몇 권이 나와 있어요. 그런데 바르트도 동성애자입니다. 그 역시 텍스트 속에 숨어 있는 권력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남긴 학자입니다.

이렇게 이질적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의 편재(遍在)에 관심을 쏟은 것은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서 정상/비정상의 대립을 만들어내며 자신의 의도대로 세상을 주무르려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권력은 청와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싸구려 쇼를 선보이고 있는 국회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생산되고 유포되며 증식되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공기처럼 스며들어 우리를 움직이는 권력이죠.

작고한 미국 배우 율 브리너처럼 머리를 빡빡 밀고 다니는 한 남자 연기자가 얼마 전에 〈여성중앙〉이란 월간 잡지를 통해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습니다. 그 일로 해서 그는 출연하던 방송 프로그램으로부터 쫓겨났어요. 유괴범도 아니요, 살인범도 아니며, 사기꾼도 아닌 평범한 연기자를 우리 사회는 배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그의 모습에서 변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에요.

그는 자신에게 닥칠 이런 불이익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것을 감수하고 밝혔습니다. 자신이 출연하던 '뽀뽀뽀'에서 아이들에게 진실되게 살라는 말을 할 때마다, 거짓으로 살고 있는 자신이 위선자라는 자책이 들어서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저는 그것이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여성들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동성애 체험을 함께 나눌 수는 없겠으나, 언제든 그의 편에 설 생각입니다. 그의 용기를 사랑합니다.

그래요. 저는 그런 점에서 이성애(異性愛)자입니다. 하지만 동성애 또한 동일한 사랑의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그가 남자로서 또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의 생의 선택일 뿐입니다. 아니 운명입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여자를 무시하고 구박하는 남자보다 훨씬 더 멋진 애정 생활의 예를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불이익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회와 다른 개인들의 삶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우리는 한 개인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피비린내를 본 불쌍한 민족으로서 더욱 더 포용력이 필요한 것이죠. 성숙한 사회란 바로 그렇게 이질성, 기이함을 끌어안는 곳입니다. 그리하여 소수의 약자를 배제하지 않는 곳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하는 열린 사회입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세계에 보여줄 의무까지 갖고 있습니다. 편가르기와 배타적인 태도 때문에 내내 폭력의 진원지가 되어온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의 반대는 정상인이 아니라 비(非)장애인이며, 동성애의 반대는 정상애가 아니라 이성애입니다. '정상'이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개념이죠. 그런 허깨비에 휘둘려 고통받는 약자와 소수자가 생겨나서는 성숙한 사회라 말할 수 없습니다.

미쉘 푸코와 롤랑 바르트가 그들의 동성애 때문에 단죄되고 배제되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프랑스 문화의 영광은 없었을 것입니다. 프랑스가 그래도 아직 우리보다 성숙한 사회인 것은 베르사이유의 문화 유적 때문도, 멋진 패션이나 향수 때문도, 감미로운 샹송 혹은 근사한 분위기의 레스토랑과 포도주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각 개인의 고유함을 존중해온 열린 태도 때문입니다.

당신은 열린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지금껏 알고 있는 것이 다'라고 믿으며 자신의 성채에서 꽁꽁 문을 닫아 건 닫힌 사람인가요? 저는 더 많은 홍석천을 보호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열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박철화(steelyflower@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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