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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사는데 착하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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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

남다른 생각 하기로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박쥐’ ‘올드보이’의 영화감독 박찬욱. 그의 작품 중에 옴니버스 영화 ‘쓰리, 몬스터’(2004)에 포함된 ‘컷(CUT)’이라는 단편이 있다.

잘생기고 부유하고 인기 많은 영화감독(이병헌) 부부가 영화에 출연했던 가난한 엑스트라(임원희)한테 납치된다. 범행 동기가 뜻밖이다. 엑스트라는 감독이 잘사는 것도 모자라 심성마저 좋다는 데 열 받는다. “부자는 여기서도 잘살고 천국 가서도 잘사는” 부조리를 참을 수가 없던 거다.

 박찬욱에 따르면 가난한 자의 전유물 같았던 착한 심성조차 이젠 유복한 환경에서 잘 자란 사람들이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성품마저 계급과 소득격차에 좌우되는 게 서글프다는 그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8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그의 문제 제기와는 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잘살면서 착하기까지 한’ 인물에 분노하지 않는다. 그러긴커녕 이런 사람이 좀 더 많이 나타나주길 원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안철수 신드롬’에서 그런 열망의 한 자락을 목격했다. 명문대 의대생이 돈벌이를 좇는 대신 자신을 키워준 사회에 부채의식을 가졌다니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닌가.

 지난해 영화 ‘완득이’가 520만 관객을 불러들인 데도 부분적으론 이런 갈망이 작용했다. 주인공 똥주선생(김윤석)은 아버지가 공장을 운영하는 유산계급이지만 달동네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산다. 똥주선생이나 안철수 교수 같은 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착한 부자? 강남좌파?

호칭이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먹고사는 데 큰 지장 없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약자와 소외계층을 배려하고 상생을 고민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런 흐름을 최근 작가 공지영의 샤넬백 해프닝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평소 진보 성향으로 알려진 그가 600만원이 넘는 샤넬백을 가졌다는 보도가 나왔고, “말로는 못사는 사람들을 위한다더니 웬 위선이냐”는 비난도 따랐다.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나라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라면 그 정도 가방이야 들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게 요지였다.

공씨는 수입으로 따지면 한국 작가들 중 상위 1%다. 그러면서도 평소 인세 기부 등 나눔에 인색하지 않았고, 『도가니』 같은 소설을 통해 약자에 대한 애정도 꾸준히 보여줬다. “잘살면 진보 성향을 가지면 안 되느냐”는 방향으로 논쟁이 향했던 이유도 그래서가 아닐까. 물론 가방은 샤넬 제품이 아니었지만.

 여야가 19대 총선을 위한 공천심사위를 만드느라 분주하다. 올해 정치권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어떤 얼굴을 내세울지일 거다. 이참에 잘사는데 착하기까지 한 사람도 물색해 보면 어떨까. 사회적으로 부러워할 만한 성취를 거뒀는데 위장전입이나 성희롱, 병역비리, 재산 불법증여 등과는 거리가 먼 사람, 가졌지만 나눌 줄 아는 사람 말이다. ‘여기서도 잘살고 천국 가서도 잘살’ 사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