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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기업을 묻다 … 애널보고서의 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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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KTB투자증권 홍헌표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론스타코리아의 외환카드 주가조작 관련 공판이 있을 때마다 서울 서초동 법원으로 달려갔다. ‘시간이 돈’인 애널리스트라지만, 당시 외환은행 인수를 추진하던 하나금융지주에 미치는 파장을 분석하기 위해 한나절을 비우고 공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재판을 지켜보면서 그간 모르던 정보를 알게 됐고, 기업 분석을 위한 힌트와 영감을 얻는 등 성과가 컸다”며 “경제가 사회·정치 현상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면서 이젠 ‘기업 밖’의 현장까지 챙겨야만 제대로 된 보고서를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애널리스트의 보고서가 다시 진화하고 있다. ‘책상머리’ 보고서에서 벗어나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직접 만나고, 생산현장을 탐방하는 ‘발로 뛰는’ 보고서를 만드는 것은 기본. 이젠 길거리 사회현상, 사건·사고까지 분석해야 제대로 된 보고서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지난달 다이와증권의 애널리스트인 이창희 전무는 서울 시내에서 흡연자들을 직접 만나 설문조사를 했다. 서울시가 추진 중인 ‘길거리 흡연 금지’ 법안이 KT&G 주가에 미칠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흡연자의 80%는 흡연습관을 바꿀 의사가 없다고 밝혔으며, 일부는 되레 법안이 필요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이 설문조사를 근거로 “서울시 법안의 영향은 제한적”이라며 KT&G에 대한 ‘보유(HOLD)’ 투자의견을 유지했다.

 현직 최장수 애널리스트인 우리투자증권 신성호 리서치본부장(전무)은 “예전에는 분석이 깊이 있고, 완성도를 갖추면 A급 보고서로 평가받았다”며 “하지만 요즘은 여기에 독창적이고 가치 있는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필수요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 보니 애널리스트가 과거에는 신경 쓰지도 않던 길거리 트렌드까지 연구하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신영증권 홍정혜 연구위원은 ‘반값 등록금 운동, 채권시장 함의’라는 보고서에서 한국은행이 지난해 6월 정책금리를 인상한 단초를 ‘반값 등록금 시위’에서 찾았다. 정부가 2008년 이후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면서 물가가 오르고 전세가격이 급등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에 먹고살기가 힘들어진 서민들이 반값 등록금 운동 같은 집단행동에 나서게 됐다. 서민정책에 힘을 싣기 위해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기 힘들어졌고, 결국 기준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게 홍 연구위원의 당시 분석이었다. 지난달 키움증권 우원성 선임연구원은 우리나라의 ▶여성경제활동 비중 증가 ▶1·2인 가구 비중 확대 ▶식생활의 서구화 등을 근거로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를 구축한 오뚜기를 추천종목으로 제시했다.

 아예 종목 추천과 증시 얘기는 단 한 줄도 없는 보고서도 등장했다. 유진투자증권 교육업종 담당 김미연 연구위원의 ‘교육의 정석’이라는 101쪽짜리 보고서다. 여기에는 대학입시 전형과 특목고·자율고의 입학전략 등 교육정보가 상세히 소개돼, 강남 학원가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때로는 날씨 같은 자연현상도 고려한다. 한국투자증권 박소연 연구위원은 ‘라니냐(La Ni<00F1>a) 어게인’이라는 보고서에서 라니냐 같은 기상이변 가능성이 커지면 곡물·고무가격이 상승하고, 이에 따라 음식료·타이어업종의 약세가 진행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투자증권 최문선 수석연구원은 지난해 ‘올여름 중국이 덥다는데 무슨 주식 사지?’ 보고서에서 더위에 따른 전력난으로 중국의 송배전망 전력시설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며 관련 수혜주를 추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보고서의 등장을 애널리스트 간 치열한 경쟁이 낳은 산물로 폄하하기도 한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보고서가 쏟아지다 보니 투자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내용이 튀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펀드매니저는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정작 펀드매니저가 원하는 주가 관련 내용은 부족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현장과 트렌드를 중시하는 것은 비단 애널리스트뿐 아니라 돈을 굴리는 펀드매니저에게도 확산되는 추세다. KB자산운용 최웅필 주식운용팀장은 “엔터테인먼트 업종의 성장성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달 자비를 들여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YG패밀리 콘서트를 보고 왔다”며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뒤 확신이 생긴 종목에만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널리스트 보고서의 진화

1980년대:자료 받아쓰기

● 기업에서 제공하는 자료 재가공

● 대기업·거시경제 분석 위주

1990년대:차트 전성시대

● 기업 실적 분석의 전문화·다각화

● 각종 수치 및 통계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

2000년대 초반:발로 뛰는 보고서

● 기업 탐방, CEO 인터뷰 등 현장에 관심

● 저평가받고 있는 코스닥 중소기업 발굴

2000년대 중반:글로벌화

● 글로벌 시장 움직임 적극 반영

● 기업·생산 현장 탐방의 일상화

2000년대 후반~:기업 밖으로

● ‘기업 밖’ 사회 현상 및 트렌드까지 중시

● 독창적 시각, 정보의 유익성 등 종합 고려

도움말:우리투자증권 신성호 리서치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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