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소설 온라인 직거래에 미국 출판계 당혹·전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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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출판계는 작가 스티븐 킹이 전자서적 시대를 좀더 앞당기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의 의미를 축소하려고 애써 왔다. 킹은 폐기될 뻔했던 미완성 서간체 소설 ‘식물’(The Plant)을 되살려 한 章 한 章 마무리 지어가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암호화되지 않은 소설 매회분을 쉽게 다운받는 대가로 1달러씩 자발적으로 낼 것을 요구한다.

이 실험엔 서스펜스와 공포가 가득하다. 서스펜스는 과연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낼 것인가 아니면 공짜로 읽을 것인가 여부에 달려 있다. 7월 24일 첫 장이 등장한 이래 15만 명 이상이 킹에게 돈을 부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통 출판사들이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특급작가가 자신들을 제치고 독자와 직거래를 트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산업이 겪고 있는 초특급 전자 두통을 미리 피하려는 희망에서 출판계 거물들은 미래에 대비한다는 각오가 대단하고, 매주 디지털 수역에 발을 담그는 새 실험을 발표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흥분해 있고, 전자서적이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고 사이먼 앤드 슈스터社의 업무책임자 잭 로마노스는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 출판사는 현재 전국에 트럭으로 수송하는 책들을 운임을 거의 들이지 않고 멀리, 즉시 배포한다는 구상에 전율을 느끼고 있다. 책은 음악 CD나 카세트와는 달리 적어도 당분간은 표준으로서의 위치가 견고하다는 점에서 운이 좋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전자서적 총책 딕 브래스가 최근 시인했듯이 그 분야의 기술은 “1908년의 자동차 업계 수준”이다.

음악산업은 냅스터 이용객들과 불협화음을 빚고 있고, 출판계는 작가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전자서적의 경우 제작비도 거의 안 들고 반품도 없기 때문에 작가에게 주는 로열티의 인상 여부가 관건이다. 작가들은 올려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지만 출판계는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전자서적과 주문인쇄가 성행할 경우 출판사는 ‘절판’ 서적이 없어진다는 점에 군침을 흘리는 반면 작가는 옛날에 낸 책에 대한 권리를 재활용할 기회가 없지 않을까 걱정한다. 출판사가 미래의 베스트셀러를 유통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이상 랜덤 하우스社나 더블데이社가 칼자루를 쥐게 마련이다. 자신의 인쇄소와 창고를 갖고 있는 작가는 없으니 말이다.

출판계가 ‘식물’을 독버섯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킹의 첫 전자서적 실험인 ‘총알 타기’(Riding the Bullet)는 출판사의 후원 아래 행해졌다. 출판사는 50만 명이 그 책을 다운받았다는 것을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인터넷을 항해할 준비가 돼 있다는 증거로 보았다.

그러나 주인의 손을 무는 개처럼 킹은 그 중개자의 몫을 가로챘다. 심지어 ‘식물’의 판촉을 위한 광고에선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말했다. “친구 여러분, 이제 우리는 대형 출판사들에 최악의 악몽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형 출판사들은 공개적으로는 그것이 악몽이 아니라 낮잠 정도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는 체한다. 디지털 유통이든 뭐든 스티븐 킹 같은 유명작가가 아니면 자신들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다수 작가들은 글을 쓰고자 할 뿐이지 작은 사업을 벌이고 신용카드 거래와 고객 서비스 업무에 개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고 로마노스는 말했다.

킹은 그런 일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전자 상거래의 거인인 아마존이 한 푼도 받지 않고 업무를 대신해 준 것이다. 제프 베조스 아마존 회장은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은 “킹이 워낙 뛰어난 작가라서 사람들은 그가 바나나 껍질에 소설을 썼다고 해도 읽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자시대에는 굳이 킹이 아니어도 자기출판이 가능하다는 것을 베조스도 이해한다.

아마존은 이미 소속 없는 작가들의 작품을 목록에 올리고 발송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전기(傳記)·소설·요리책 등이 정교한 독서장치로 디지털화되면 쉽게 확대될 수 있는 일이다. 베조스는 “작가들이 작품을 디지털 포맷으로 전환하는 것을 기꺼이 돕겠다”면서 “마케팅도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제 출판계의 운명은 다한 것인가. 그리고 모든 작가가 킹을 흉내낼 것인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출판에서 주요 비중을 차지하던 유통의 기능이 사라진다 해도 편집과 특히 마케팅 등 출판사가 제공하는 다른 서비스의 비중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책을 쉽게 다운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면 옛날처럼 서점 중심으로 책을 판촉하던 방법도 바뀔 것이다. “독자들과의 관계를 갖는 측이 주도권을 쥘 것”이라고 작가 세스 고딘은 말했다. 출판사들은 이제 작가들이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전에 없이 높다는 것을 이미 잘 알기 때문에 뭔가 대책을 궁리해낼 것이다.

스티븐 킹도 출판계의 앞날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출판계는 지나친 걱정을 하고 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말하지만 ‘해리 포터’ 시리즈 4탄은 5백만 부나 팔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2010년의 J.K. 롤링 역시 대형 출판사를 통해 전자서적을 출판할 것이다. 다만 로열티만큼은 지금 작가들보다 훨씬 더 많이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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