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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나라당 율사들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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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사회부문 부장

몇 주 전 ‘벤츠 여검사’ 수사 속보를 읽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 안면신경을 건드렸다. 변호사가 내연관계였던 여성 검사에게 결별을 선언한 뒤 내용증명을 보냈다는 대목에서였다. 청탁 대가로 줬던 벤츠를 돌려달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헤어짐에도 내용증명이 필요한 게 법조인의 사랑일까. 남이 알면 큰일 날 일을 갖고 우체국까지 가서 서류를 내미는 장면이 그려졌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문득 ‘법조계의 한 단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법률로 먹고사는 이들이 법적 수단을 선호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문제는 적지 않은 법조인이 법 정신의 경계 밖에서 실정법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데만 유능하다는 점이다.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한국 정치가 검찰 수사에 기대게 된 데는 다 사정이 있다. 판검사 출신 국회의원이 급증한 탓이 크다. 아는 게 법이다보니 너무 쉽게 고소·고발을 동원한다. 그러면서도 내부의 불법적 관행엔 좀처럼 분노하지 않는다. 아니, 무감각하다. 이번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도 그 연장선에 있다. 주연·조연 모두 법조인이다. 의혹을 폭로한 고승덕 의원은 판사 출신 변호사다. 돈봉투 제공자로 지목돼 검찰 조사를 받게 된 박희태 국회의장은 검사 출신이다. 박 의장이 정당법의 ‘당 대표 경선 매수 금지’ 조항을 몰랐다고 보긴 어렵다. 고 의원은 정의감을 3년 반이 지난 시점에 표출한 배경을 의심받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 네 명 중 한 명(23.1%)이 법조인이라는데 이들은 또 어떤 마음으로 ‘돈 경선’에 임했는지 궁금하다.

 또 한 가지, 법률가로서 마땅히 목소리를 높여야 할 현안엔 침묵하고 있다.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 미아(迷兒)’가 돼버렸다. 초유의 헌법재판관 공석 사태다. 헌법에 따라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돼야 할 헌법재판소가 여섯 달 넘게 8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헌법 위반’이 분명한데도 한나라당 내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법조인은 보이지 않았다.

 “정부의 천안함 사건 발표를 받아들이지만 확신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조 후보자의 안보관에 의구심을 가질 수는 있다. 부결될까 우려해 본회의 안건에서 뺐던 야당 태도도 온당치 못하다. 하지만 헌법재판 시스템에 구멍이 뚫린 것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이다. 진정한 법률가라면 교착 상태를 풀 방법을 찾는 데 앞장섰어야 했다. “재판관 9명 중 야당 몫은 한 명이다. 그 ‘9분의 1’의 다름조차 품지 못해 위헌 상태를 장기화시켜서야 되겠나.” 이렇게 말하는 이도 한두 사람쯤은 있었어야 했다.

 유권자들이 율사 출신 후보에게 던진 표에는 법과 정의를 지키는 ‘소금’ 역할을 해달라는 바람도 담겼을 것이다. 그 기대를 외면하며 자기 앞가림에 급급한 자, 스스로에게 금배지를 달 자격이 있는지 답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