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 ‘현대사태’ 다음 수순은?

중앙일보

입력

한국경제를 불안하게 만든 현대문제가 수습국면에 들어섰다. 하반기 경기도 하강세로 돌아서면서 현대사태를 제때에 잘 풀지 않으면 더 힘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았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경제팀 개각 이후 첫 과제인 현대사태가 급한 대로 봉합은 됐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정말 잘 수습될 것인가. 현대는 약속을 성실히 이행할 것인가. 현대가 약속을 어기면 또 다시 경제는 헝클어질 것이란 우려도 남아 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수습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현대사태 이후’ 추가로 풀어야 할 숙제를 점검해 본다.

눈물을 뿌린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한 차례 지나가자 잠시 잊었던 현대문제에 관심이 다시 쏠리고 있다. 5개월여를 끌면서 남한 경제를 불안하게 했던 현대문제는 앞으로 어찌될 것인가.

때마침 하반기 경기도 하강세로 돌아서면서 현대사태를 제때에 잘 풀지 않으면 더 힘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소리도 높아지는 상황이다.

전쟁중 마상장수(馬上將帥)
교체라는 말을 들었던 경제팀 개각 이후 현대는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현대차 지분을 매각키로 결정했다. 현대사태의 근원 문제라 할 수 있는 현대건설의 유동성 문제도 현대차 지분 매각여부로 풀 수 있게 됐다는 관측이다. 일단 급한대로 봉합은 된 셈이다. 그러나 앞으로가 문제다. 정말 잘 수습될까 -. 엄청난 폭발력의 ‘현대뇌관’은 제거된 것일까.

현대 발표안에 대해 정부·채권단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인 편이다. 시장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는 아닌 것 같다. 자구계획 발표 다음날 주가가 상승세를 보인 점이나 시장 신뢰가 회복됐다는 판단 아래 채권은행들이 현대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등에 대해 만기 연장을 해 주기로 한 것 등이 이를 말해 준다. 그런 점에서 화급하던 현대사태는 일단 봉합은 된 셈이다.

그러나 완치가 아니라 급한 불을 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수습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게 재계 안팎의 시각이다.

모든 경제문제가 그렇지만 시간이 돈이다. 공연히 시간을 끌다간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막는다. 비용도 엄청나게 든다. 현대측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시장은 마냥 기다려 줄만한 여유가 없다. 하반기 경기도 하강세다. 경제체력도 눈에 띌 만큼 취약하다.

사실 이번 해결책을 놓고 일부에서는 현대가 또다시 ‘시간벌기 전술’을 구사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3父子 퇴진’등 올해 현대가 약속했던 말을 뒤집은 여러 사건들을 감안할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총론상으로는 현대가 정부에 백기를 든 셈이지만 재벌개혁의 핵심과제인 지배구조 개선문제가 미제로 남아 있고 중공업계열 분리, 현대차 지분 매각대상 논란 등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다.

정부와 채권단은 현대가 발표한 ‘경영개선 계획안’을 연말까지 월별로 점검, 자구실적 미흡시 여신중단·회수 등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할 방침이다.

금감위 관계자는 “현대가 채권단과 협의해 발표한 자구계획의 이행 가능성에 대해 시장 일각에서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만큼 이를 불식하기 위한 안전장치 마련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현대사태가 극적인 해결을 보면서 현대 정주영 전 명예회장 ‘3부자’와 ‘가신’들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선 오너그룹인 3부자 중 몽구(MK)
- 몽헌(MH)
은 결별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MH산하의 그룹에서 MK의 자동차 소그룹이 분리되기 때문이다. 그간 형제간 내분의 장기화로 갈등의 골이 깊어진데다 동반퇴진 선언 이후 완전히 등을 돌린 점도 이같은 관측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 내부에서는 정반대의 추측도 나오고 있다. 그동안 내분의 불시로 작용했던 계열분리 문제가 어떤 형식으로든 해소된 마당에 더 이상 다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건강이 악화된 鄭 전 명예회장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형제간 화합이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최근 장자인 MK의 역할론이 대두되면서 화해무드를 점치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MK는 최근 현대사태의 와중에 MH측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 화해의 손짓을 보냈고 주위에도 가족화합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누차 피력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이에 따라 금명간 모종의 가족 행사가 열릴 것이란 얘기도 전해진다.

그동안 ‘문제경영진’으로 지목된 가신그룹에 대해서는 ‘퇴진’을 점치는 시각이 많다. 당장의 외자유치와 대북사업 등 현안을 챙기느라 무사했지만 앞으로의 진로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현대가 “앞으로 이사회와 주주총회 등 공식 의결절차를 거쳐 조만간 거취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밝힌 점도 장기적으로 이들을 ‘정리’하겠다는 의사로 보인다.

현대 관계자는 “우리 기업의 현실에서 아직도 ‘오너’는 탄탄하고 또 오너와 월급쟁이사장의 경계는 분명한 것 아니냐”며 일부 가신의 정리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쳤다.

특히 정부와 채권단으로부터 반공개적인 퇴진압력에 직면했던 이익치 현대증권회장은 사면초가 형국이다. 중공업 - 전자 소송사태로 민사소송에 이어 금감위에서 형사고발 방침이 흘러나오는 등 입지가 크게 위축돼 있다. 李회장은 현대 자구안 발표 후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윤규 건설사장과 김재수 구조조정 본부장도 사정은 비슷하지만 사정권에서는 한발 비켜 섰다는 관측이 높다.

그러나 현대의 발표는 ‘선언’수준이고 MH의 성격상 가신그룹을 끝까지 보호할 것이란 해석도 없지 않다. 이 문제는 지배구조개선 문제와 맞물려 간단치 않을 전망이다.

채권단 입장에서도 특정 경영인을 지목해 퇴진을 요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무작정 밀어붙이기는 힘든 실정이다. 한때 불거졌던 3부자 퇴진약속 이행의 경우 앞으로 그 같은 약속을 계속 이행하겠다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현대문제의 핵심은 건설의 유동성 문제이며 鄭씨 3부자와 문제 경영진 퇴진은 현대 스스로 알아서 하기로 한 만큼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대목은 정부가 재벌개혁의 역점추진 과제로 못박은 지배구조 개선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일각에서는 “결국 정부가 對현대 압박에서 이렇다 할 개혁성과를 얻지 못한 게 아니냐”며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정몽구 회장의 퇴진은 유야무야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김경림 외환은행장은 “현대자동차의 계열분리가 이뤄질 것이고 계열분리된 현대자동차는 부실경영도 아니어서 경영진의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고 사실상 3부자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현대차 지분정리도 진통이 예상된다.

현대자구안 발표 직후 채권단은 정주영 전 명예회장으로부터 사들이는 현대차 지분 6.1%를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나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등에 매각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현대의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 김경림 행장이 “계열분리 요건에 저촉되지 않는 한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나 정세영 명예회장 등 특정인을 매각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채권단이 정주영 전 명예회장 지분을 제 3자에게 매각할 계획인데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나 그 특수관계인은 배제한다고 밝힌데 이어 나온 발언이어서 관심을 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는 “가상의 경우이긴 하지만 정세영 명예회장이 이 지분을 가져가는 것은 분리된 그룹이 다시 현대계열사로 편입될 가능성이 있어 곤란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전제,“정몽구 회장은 분리되는 쪽이기 때문에 지분을 추가로 가져가도 계열분리 요건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밝혔다. 현대측은 왕회장 자동차 지분을 해외 직접매각 쪽으로도 눈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중공업과의 관계도 미묘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현대 자구안 발표 직후 현대자동차와 중공업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현대차는 적극 환영하는 분위기였고 중공업은 현대의 자구안 발표 직후 강한 반발을 보였다. “그룹측이 중공업을 계열분리할 의지가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중공업은 하룻만에 태도가 돌변 “당초 기대에는 못미치지만 최대한 계열분리를 앞당겨 주겠다고 하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한발 빼는 모습이었다.

현대중공업 권오갑 이사는 “중공업을 계열 분리하려면 각 계열사의 지분을 다 흔들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있어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며 “그룹과 중공업이 특별한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고 그룹 입장을 이해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중공업의 이같은 태도변화에 대해 내부에서는 ‘전술상 후퇴’로 해석한다.

정부와 채권단이 현대측 수습안에 만족하는데 괜히 중공업만 반발해 현대사태가 또다시 헝클어지면 중공업이 덤터기를 쓸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또 8·15경축 행사와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중공업이 시끄러울 경우 최대 주주인 정몽준 의원이 눈총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중공업측은 중공업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나오면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과 정몽준 의원간의 갈등으로 비쳐져 중공업과 鄭의원의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며 당분간 현대전자와의 소송에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룹 구조조정 본부측이 그룹의 자금줄인 중공업의 족쇄를 쉽게 풀어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그룹 안팎의 관측이다. 따라서 중공업은 시간을 봐서 다시 중공업 계열분리 문제를 제기하되 우선 현대전자와의 대지급금 소송에 전력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鄭의원은 정치인으로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될 수 있으면 형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잡음없이 중공업 계열분리를 끝내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공업 계열분리를 둘러싸고 ‘파열음’이 생길 가능성은 해소되지 않았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이기수 기자 <leek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