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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에게 빚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고인에게 고백한다 … 미안합니다. 참 죄송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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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신문사 대선배로부터 이근안을 ‘만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배된 해직기자를 집에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남영동(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한 조사관이 들어와 “이 자식 빨갱이구먼”이라며 대뜸 뺨을 후려쳤다. 한참 겁을 주다가 손으로 어깨를 툭 건드리자 어깨뼈가 순식간에 빠져버렸다. 공포감에 휩싸여 있는 사실은 물론 없는 일까지 다 내가 했노라 털어놓고 싶어졌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이근안 경감이었다.

 어제 영결식이 거행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85년 ‘칠성판’ 위에서 무려 22일 동안 훨씬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이근안은 7년형을 받고 복역한 뒤 200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고생한 김근태와 목사가 된 이근안. 영화 ‘밀양’, 그리고 ‘밀양’의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이청준)가 현실 속에서 재현된 느낌이다. 자식을 유괴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러 교도소를 찾아간 여인. 그러나 감옥에서 전도 받아 기독교인이 된 범인은 평온한 얼굴로 “나는 하나님에게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절망한 여인은 결국 자살을 택한다.

 고 김근태 선생은 이근안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그가 2005년 여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근안을 면회 갔을 때 이근안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가식처럼 느껴져 흔쾌히 용서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자신이 “너무 옹졸한 사람 같다”며 자책한 사람이 바로 인간 김근태다. 정치부 기자 시절 접해 본 김근태는 “이런 분이 어떻게 정치를 하시나” 싶은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선비였다. 아무리 볼품없어 보이는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객을 맞이했고, 일부러 문밖까지 나와 배웅했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여야,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고개 숙여 추모하는 분위기다. 특히 야권에서는 ‘2012년을 점령하라’는 고인의 마지막 글을 들어 “올해 총선·대선에서 꼭 승리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정치적 이해를 앞세운 아전인수식 해석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나의 경우 고 김근태 선생을 소리 높여 추모할 자격도 이력도 갖추지 못했다. 단 한 가지 고백하자면, 예전부터 왠지 그에게 빚을 지고 사는 느낌이었다. 살다 보면 간혹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뭘 받거나 얻어먹은 것도 아닌데 자꾸 미안하고 죄송한 생각만 드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내게는 김근태가 바로 그런 이였다. 동시대를 사는 적지 않은 이들이 아마 나와 같은 느낌을 갖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래서 어제 모란공원에서 ‘민주주의자 김근태’라는 글귀가 쓰인 천을 덮고 영면에 들어간 고인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미안합니다. 참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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