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R&D+중국 생산력 날개 단 ‘차이완(China+Taiwan) 브랜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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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호 07면

베이징의 정보기술(IT) 단지인 중관춘(中關村)의 휴대전화 매장에서 소비자들이 ‘HTC’ 브랜드의 스마트폰을 살펴보고 있다. HTC는 중국시장에서의 강점을 바탕으로 세계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올 3분기에는 미국시장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Imaginechina 제공]

대만은 ‘정보기술(IT) 대국’이다. 전 세계 노트북PC의 93.7%를 대만 기업이 만든다. 초(秒)당 두 대꼴이다. 그럼에도 ‘IT 강국’으로는 대접받지 못한다. 남의 브랜드를 달아 제품을 만드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대만이 글로벌 브랜드 육성에 나섰다. 중국과의 사실상 자유무역협정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 체결 이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ECFA 발효 1년, ‘세계 OEM 단지’라는 대만의 산업현장에선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중·대만 자유무역협정(ECFA) 발효 1년, 대만은 지금

대만 타이베이(臺北) 인근 타오위안(桃園)에 자리 잡은 통신기기 회사인 HTC 본사. 건물에 들어가니 흘려 쓴 영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quietly brilliant’. 왕징훙(王景弘) 마케팅 부문 사장에게 그 뜻을 물으니 “조용히 좋은 제품을 소비자에 공급하자는 회사 슬로건”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회사는 지금 조용하지 않다. 올 3분기 미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삼성전자를 누르고 최고 시장점유율(24%)을 기록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방문객으로 북적인다.

이 회사의 출발(1997년)은 대만의 다른 중소기업과 다르지 않았다. 미국 컴팩컴퓨터의 개인휴대단말기(PDA)를 위탁 생산하는 평범한 OEM 업체였을 뿐이다. HTC는 그러나 21세기 들어 ‘손가락 터치 기술’을 개발하면서 ‘브랜드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2008년 터치식 휴대전화인 ‘HTC 다이아몬드’를 출시했고, 불과 4년 만에 애플·삼성전자에 뒤이어 세계 3대 글로벌 휴대전화 브랜드로 부각되고 있다. OEM 파트너였던 컴팩컴퓨터가 2002년 HP에 흡수돼 사라진 데 비교하면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중국 시장이 받쳐 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HTC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요즘 10% 안팎. 중국 시장 진출 1년여 만에 거둔 성과다. 왕징훙 사장은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이미 애플을 추월했고, 1위인 삼성(약 18%)을 맹추격 중”이라며 “우리는 중국 소비자들의 심리를 가장 잘 읽어 내기에 1위를 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시장과 HTC의 기술력이 결합된 ‘차이완(ChiWan) 브랜드’의 탄생이다.

“80년대가 OEM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주문업체와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자체개발주문생산(ODM)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자가브랜드생산(OBM:Own Brand Manufacturing)이 대세입니다. 현재 전 세계 IT 업계는 애플과 삼성전자가 주도하고 있지만 5년 후에는 그 자리를 차이완 기업이 차지할 수 있습니다.” 대만 산업정보연구소(MIC)의 컨설턴트 선쥐싼(沈擧三) 주임은 “모든 산업 분야에서 대만의 기술력과 중국의 생산력·시장이 결합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선 주임과 함께 방문한 PC 업체 아수스(ASUS)의 장링이(張令儀) 홍보담당관은 “OEM으로 시작한 아수스 역시 지금은 자가 브랜드로 세계 노트북PC 시장의 40% 안팎을 차지하고 있다”며 “생산업체가 아닌 브랜드 회사(Brand Company, Not Manufacturer)로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대만 IT 기업들의 도약 과정에선 ECFA가 기폭제로 작용했다. 2011년 1월부터 발효된 이 협정에 따라 중·대만은 공산품·서비스 분야 806개 품목에 대해 관세를 철폐한 데 이어 매년 협상을 통해 ‘관세 철폐 품목’을 늘려 왔다. KOTRA 타이베이 무역관의 송익준 차장은 “대만 기업들이 중국 시장을 자기 텃밭으로 여기면서 ‘우리도 세계적인 브랜드를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CFA 체결을 전후로 투자의욕이 되살아나면서 대만 경제는 2010년 10.9%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ECFA가 대만 경제의 체질을 바꾸고 있다는 얘기다.

제조업 분야에서도 양안 간 경제국경은 허물어지고 있다. 타이베이 시내에 있는 종합 에너지 설비업체인 델타(臺達)전자. 2010년 66억 달러였던 매출액 가운데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안팎에 불과했다. 그러나 생산은 모두 중국에서 이뤄진다. 13개 중국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만 6만 명에 달한다. 델타의 얀시하이 사장은 “ECFA 덕택에 개발은 대만의 연구개발(R&D)센터에서, 생산은 중국에서 각각 담당하는 분업 구조가 더욱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중·대만은 이제 하나의 경영 단위”라고 말했다. ‘DELTA’ 브랜드는 ‘대만의 GE’라는 별명을 얻으며 세계 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자이언트(자전거)·존슨(운동기기) 등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업체들 역시 ‘기술 개발은 대만에서, 생산은 중국에서’라는 분업 구조로 경쟁력을 키워 가고 있다. 대만의 중부 타이중(臺中)에서 만난 다니엘 클레이톤 존슨(독일인) 부사장은 “양안 간 분업 시스템은 모든 대만 기업이 추구하고 있는 길”이라며 “세계 기업들은 이제 차이완 브랜드를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이완 브랜드는 이미 한국 기업들을 위협하고 있다. HTC는 대부분의 세계 시장에서 삼성 갤럭시와 경쟁하고 있다. OEM에 만족하던 대만 PC 업체들이 자가 브랜드 전략으로 나오면서 우리나라 PC 제조업체들은 시장에서 철수해야 할 판이다. 타이베이의 반도체 관련 업체인 코아시아의 이희준 사장은 “정보통신·기계·석유화학 분야에서 대만 기업들은 중국이 갖는 생산력과 시장의 이점을 향유하고 있다”며 “한국 기업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도 대만 업체에 밀리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중 FTA 체결, 중국 시장을 겨냥한 한·대만 기업 제휴를 통해 차이완 브랜드 부상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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