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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고 → 잃고 → 꾸고 → 자포자기...도박 중독되는 데 1년도 안 걸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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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호 14면

강원랜드 입구의 정선군 사북읍·고한읍 일대는 도박에 빠진 이들을 주 고객으로 삼는 업체와 시설들이 빼곡하다. 강원랜드 중독관리센터 김창완 사무국장은 “자동차·패물 등을 받고 돈을 내주는 전당사(전당포)가 사북·고한에만 70개가 넘는다”고 말했다. 새벽 휴장시간이 되면 카지노 정문 근처에는 ‘꾼’들을 실어나르는 찜질방 버스가 줄을 잇는다. 이들을 상대하는 대형 찜질방 수십 곳이 성업 중이다. 이 밖에도 싼값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PC방·모텔·여인숙도 지방 소도시치고는 유난히 많다. 서울 등에서 내려온 사채업자도 상당수 활동한다고 한다. 모두 카지노 고객들을 상대로 하는 업체나 사람들이다. 도박 중독의 끝은 파멸로 이어진다. 전 재산을 날리고 직장은 물론 가족관계까지 끊긴 뒤 끝내 자살로 내몰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 강원랜드가 있는 정선경찰서 관내에서 올해 11월까지 파악된 자살자 수는 36명. 사업으로 모은 전 재산을 잃은 뒤 현재는 강원랜드와 소송을 진행 중인 정덕(전국도박피해자모임 대표)씨는 “자살이 꼭 정선군 관내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도박 중독으로 인한 비극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지노 근처 전당포·찜질방 수십 곳 성업
도박 중독으로 이어지는 계기는 단순하다. 상당수가 한두 차례의 ‘짜릿한 경험’에 이끌려 빠져들게 된다.
강원랜드 중독관리센터(KLACC) 강성군(심리학 박사) 상담위원은 60대 A씨의 사례를 들었다. A씨는 정부 중앙부처에서 일하다 퇴직했다.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가 수퍼마켓을 운영하며 살았다. 일상생활은 평온했다. 우연히 친구들과 태백산 등산 여행을 왔던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하산길에 친구의 제안으로 일행은 강원랜드에 잠깐 들렀다. A씨로서는 평생 처음이었다. 몇 시간 머무르는 사이 A씨는 슬롯머신에서 7만원을 땄고, 기분좋게 귀가했다.

카지노 도박에 빠진 사람들

하지만 평범한 수퍼마켓 주인으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그는 자꾸 강원랜드에서의 ‘행운’을 떠올리게 됐다. 결국 다시 카지노를 찾았고, 악몽은 시작됐다. 불과 1년여 만에 그는 수퍼마켓과 집과 퇴직금을 모두 날렸다. 7억원이 넘는 돈이었다. 부인도 집을 떠났다. 서울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실패한 A씨는 서울 강원랜드 중독관리센터에서 상담을 받았다. 마음을 고쳐먹은 A씨는 울산에서 노동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자신 때문에 상처를 입은 딸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 주려 했다. 몇 달을 고생해 300만원을 모아 부산으로 가려고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A씨. “이걸 더도 말고 두 배로 만들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했다. 그길로 강원랜드로 갔고, 그날로 다 날렸다. 강원랜드 인근에서 다시 자살을 시도했고 상담위원인 강 박사를 만났다. 오랜 상담 끝에 다시 마음을 추슬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A씨는 도박에서 손을 뗀 것일까.

강원랜드 카지노 개장 시간(오전 10시)을 앞두고 입구에 몰려든 사람들. 평일 오전이지만 개장 30분도 안 강원랜드 카지노 개장 시간(오전 10시)을 앞두고 입구에 몰려든 사람들. 평일 오전이지만 개장 30분도 안강원랜드 카지노 개장 시간(오전 10시)을 앞두고 입구에 몰려든 사람들. 평일 오전이지만 개장 30분도 안 돼 실내는 만원이 된다. 정선=최정동 기자

강 박사는 “얼마 전에도 전화가 왔어요. 상담을 받은 중증 중독자는 강원랜드 출입이 정지되는데, 이걸 풀어달라는 겁니다. 절대 안 된다고 했지요”. 그는 “도박은 죽어야 끊는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도박 중독으로 인생이 파탄 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수원지검 안양지청은 22일 법인카드로 속칭 ‘카드깡’을 해 카지노에서 사용하고 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업무상 배임 등)로 공정거래위원회 전 국장 A씨를 구속 기소했다. A씨는 업무용 법인카드로 식비 등을 결제한 것처럼 카드깡을 해 마련한 9000여만원을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사용한 혐의다. A씨는 업체 두 곳으로부터 잘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2200여만원을 받은 혐의도 받고 있다. A씨는 업무용 법인카드로 카드깡을 해 카지노를 출입하는 등 모두 630여 차례 강원랜드에서 도박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카지노 무단출입 사실이 적발돼 대기 발령됐으면서도 강원랜드를 찾았고,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인 지난달에도 카지노를 드나들었다. A씨는 지난달 공정위에서 해임됐다.

경기도 한 지역의 상공회의소 의장까지 지냈던 사업가 B씨는 20억원이 넘는 돈을 날리고 월세방에 사는 처지가 됐다. 마지막이라며 딸의 승용차를 훔치다시피 타고 와 맡긴 돈으로 도박을 했지만 또 날렸다. 그리고 ‘죽어버리겠다’며 소동을 부리다 중독관리센터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갱생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중독관리센터 박광명 센터장은 “상담을 받으면 어느 정도 개선되기는 하지만 손을 완전히 씻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본인의 초인적인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치료의 어려움을 설명했다.강성군 박사는 “얼마 전 마카오로 자료 조사차 갔다가 예전에 상담했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며 “번듯한 전문직에서 몰락한 뒤 국내 카지노는 영구 출입정지라 마카오로 왔다는데, 돈이 한 푼도 없더라”고 했다.
여성 중독자 사례도 적지 않다. 통계상 중독관리센터를 찾는 이의 남녀 비율은 7대 3 정도다. 10년 전에 비해 여성 비율이 꾸준히 늘고 있다. 강 박사는 “여성들은 일단 중독되면 그 증상이 남성보다 더 심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초인적 의지로 노력해야 벗어날 수 있어
전문가들은 도박 중독의 단계를 보면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강원랜드 중독관리센터 서울사무소의 신행호 상담위원은 “도박 중독은 보통 네 단계를 거친다”고 말했다. 처음 도박에 발을 들여 ‘돈을 따는 단계(승리기)’가 있다. 꼭 큰돈일 필요는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분위기에 매혹되기도 한다. 스스로 도박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운이 따른다’는 착각으로 도박에 빠져들게 된다.
이 단계를 거치면 돈을 잃기 시작한다(패배기).

신 위원은 “카지노건 경마건 기본적인 승률은 개인에게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돈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빠져들면서 눈덩이처럼 손해가 커진다는 점이다.다음 단계는 돈을 융통하기 위해 주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카드를 돌려 막고,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절망기’다. 마지막에는 대부분 가정이나 직장에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잃고 자살을 시도하는 등 ‘포기 단계(종말기)’에 이르게 된다.
신 위원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네 단계를 거치는 데 1년이 채 안 걸리는 경우도 많다”며 “진행 과정에서 누군가 막아주거나 어떤 계기가 생기지 않는 한 거의 모든 사람이 같은 과정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도박에 쉽게 중독되는 유형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위험 감수성이 높고 강한 자극을 추구하는 유형이 대표적이다. 주변에서는 배포가 있다거나 용감하다는 평가를 듣는 경우도 많지만, 도박을 경험하면 쉽사리 중독 상태에 빠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사람들도 중독에 취약하다. 흔히 말하는 내성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신 위원은 “고립된 인간관계에서 오는 외로움을 도박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으로 보인다”며 “여성 중독자 중에 이런 유형이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열등감이 많은(자존감이 낮은) 이들도 돈 앞에 차별 없는 도박의 속성에 쉽게 넘어간다고 한다.일단 도박에 중독되면 여간해서는 스스로 헤어나오기 어렵다. 질병이라는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이 꼭 필요한 이유다.


도박중독 상담·관리센터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중독예방치유센터 (경기·부산·광주·강원 지역센터), 080-300-8275, www.pgcc.go.kr ▶강원랜드 중독관리센터, 080-7575-545(정선), 080-7575-535(서울), klacc.high1.com ▶한국마사회 유캔센터, 080-815-1190, ucancenter.kra.co.kr ▶경륜경정 중독예방치유센터, 080-646-5000, www.c-mclinic.or.kr ▶한국단도박모임, 02-8888-320, www.dandoba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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