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할아버지 서럽겠어요 ‘3무 크리스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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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에너지 사용 제한조치에 따라 장식용 조명 점등이 오후 7시로 두 시간 늦춰지면서 성탄 분위기가 더 썰렁해졌다. 22일 오후 서울 명동 신세계백화점의 일부 장식용 조명과 분수대 조명이 꺼져 있다. [김도훈 기자]

크리스마스를 1주일 앞둔 지난 토요일(17일) 오후. 회사원 김성민(26)씨는 아내와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서울 강남역을 찾았다. 김씨는 “흥겹고 북적대는 성탄절 분위기를 만끽하려고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남역 인근 거리의 분위기는 ‘메리(즐거운) 크리스마스’와 거리가 멀었다. 상점에서는 캐럴 대신 팝송이 흘러나왔고 거리에 놓인 크리스마스 트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강남역 버스정류장 부스 위에 한 음료업체가 올려놓은 산타 모양의 장식물만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음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김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당황스럽다”며 두 시간 만에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흥겨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이끌던 ‘삼두마차’가 사라졌다. 캐럴과 크리스마스 트리가 거리에서 사라졌고,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자취를 감췄다. 지난 17~21일 취재진이 만난 서울 시내 주요 상권인 명동과 강남역 주변 상인들은 “5년 전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실종됐다”며 “상인들 사이엔 크리스마스에 아예 쉬자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강남역 인근 1㎞ 거리에 늘어선 상점들 중 캐럴이 흘러나오는 곳은 대형 옷가게와 화장품매장 등 10곳이었다. 명동 역시 대형 매장 2곳에서만 캐럴을 틀었다. 명동지하쇼핑센터에서 음반 매장을 운영하는 한모(42)씨는 “캐럴을 찾는 사람이 크게 줄어 올해부터는 아예 캐럴 음반을 들여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가수·개그맨들이 앞다퉈 출시하던 캐럴 음반도 올해는 김동률·박기영 등의 캐럴 등 3개에 불과하다. 음악 순위 사이트인 가온차트에 따르면 ‘크리스마스’를 테마로 한 음원 중 12월 넷째 주 디지털종합차트 100위 안에 든 곡은 70위인 아이유의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등 두 개뿐이다.

 강남·명동 거리에 놓인 크리스마스 트리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대형 트리는 명동예술극장 앞에서만 눈에 띄었다. 강남에서는 5곳, 명동에서는 3곳의 매장에서만 계산대 근처에 어린아이 키만 한 작은 트리가 놓여 있었다. 강남역 인근에서 25년째 보쌈집을 운영하는 강선희(56·여)씨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를 낸다고 트리를 사서 내놨는데 요즘은 그런 곳이 없다”고 말했다.

 거리에는 가족 단위보다 친구·연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강남역·명동 인근 행인 중 3인 이상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은 한 시간에 한두 팀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명동에서 만난 조은선(21)씨는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무슨 선물을 받을까 궁금해 하며 가족끼리 즐겁게 보냈다”며 “요새는 가족들도 각자 약속이 있고 쇼핑하느라 바쁘다”고 말했다.

 백화점의 전구장식 점등 시점이 올해부터 늦춰진 점도 연말 밤거리 풍경을 휑하게 했다. 지난 5일 정부는 ‘에너지 사용제한 공고’를 발표하고 백화점의 외부 경관 조명을 오후 7시부터 켜도록 했다. 잠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외관 조명도 10% 이상 줄였고, 덜 반짝이는 LED전구로 교체했다”고 말했다. 주부 류미선(42)씨는 “어린 두 딸과 야경을 즐기러 해질녘에 맞춰 나왔는데 우리 동네 골목처럼 어두컴컴하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전해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도 거리 분위기를 한층 어둡게 했다.

글=조혜경·강나현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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