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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대북 조문, 굳이 막을 일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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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어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 한·미 정보당국자들에게 반응을 떠보았다. 국정원 고위관계자는 “사전에 아무런 첩보가 없었다”고 했다. 서울의 미 중앙정보국(CIA) 관계자도 “우리 역시 전혀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한마디로 깜깜했다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 사망 때와 똑같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안기부장은 “북한의 12시 중대발표나 들어보고 점심이나 같이 하자”며 느긋해 하다 뒤통수를 맞았다. 17년간 대북 정보전에 무슨 발전이 있었는지, 민망할 따름이다.

 한·미 정보당국은 뒤늦게 분석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공통적으로 짚는 대목은 “그나마 김 위원장 사망이 52시간 만에 공개된 것은 희소식”이란 점이다. 34시간 뒤에 발표된 김일성 주석 사망보다는 늦었지만, 독재국가치고는 상당히 빠른 편이다. 정보당국은 “북한 권력층의 내분(內紛)이 예상보다 심각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지표”라고 진단한다. 김 위원장은 20년간 후계 구도를 다졌다. 이에 비해 김정은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은 후계자로 지명된 지 채 2년이 안 됐다는 것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한·미 정보당국은 “그렇다고 김 부위원장의 독주는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른도 안 된 데다 ‘핏줄’ 빼고는 리더십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미 정보당국이 눈여겨보는 인물은 5명이다. 광범한 네트워크를 지닌 장성택·김경희 부부와 문고리 권력이던 김옥, 그리고 군부 실세인 이영호와 김영철이 그들이다. 권력투쟁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게 오랜 역사다. 조선중앙TV 리춘히 아나운서가 “현명한 김정은 동지의 영도 따라…”라고 흐느꼈지만, 그는 아직 형식적 지도자일 뿐이다. 그가 실제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듯 보인다. 그나마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북한이 앞으로 한층 종잡기 어려운 불안정한 구도로 접어들 게 분명하다.

 벌써 우리 사회에는 조문을 둘러싸고 균열이 생겨날 조짐이다. 울부짖는 듯한 주사파(主思派)도 한심하지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 식의 감상적 접근도 경계 대상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남북통일의 장밋빛 환상이 지배해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서울대 안상훈 교수는 “북한의 급작스러운 붕괴는 재앙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못 박아 놓았다.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은 자동으로 대한민국 국민 자격을 가진다. 이를 금지시켰다가 헌법소원이 청구되면 백전백패다. 안 교수는 “이는 매달 최대 71만8846원을 지원하는 2인 기준 기초생활수급 대상이 1000만 가구 이상 늘어난다는 의미”라며 “매년 예산의 25%가 넘는 86조원을 부담할 준비가 돼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북한은 적대세력이자 동시에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한반도 안정에 방점을 찍는 주변 강대국들도 의식해야 한다. 이제 우리도 김 위원장 사후에 어떻게 북한을 비핵화와 개혁·개방으로 이끌어 낼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물론 천안함·연평도 사태를 생각하면 괘씸하기 짝이 없다. 3대 세습도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정치적 문제와 외교적 문제는 구별해야 한다. 감정보다 이성적으로 접근할 때다. 필요하면 외교적 차원에서 북한에 조의를 표하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싶다.

 국민 정서상 정부 차원의 조문은 분명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사적(私的) 조문 정도는 허용하는 게 어떨까 싶다. 북한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조문단을 파견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는 조전(弔電)을 보냈다. 만약 이희호 여사와 권양숙 여사가 대북 조문을 희망한다면 굳이 막을 일은 아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추진한다”는 헌법 제4조에 부합한다면 말이다. 생쥐도 단 하나의 구멍에 자신의 운명을 걸지 않는다고 한다. 종북(從北)이나 대북 강경의 외길에 나라의 운명을 걸 수 없다. “두 사람의 우정에는 한 사람의 인내가 필요하다”는 타미르 속담을 떠올리며, 지금은 우리가 북한에 인내를 발휘할 때가 아닐까 싶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