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현실의 도피처인가 창조와 소통의 공간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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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호 01면

체감기온 영하 10도를 밑돈 15일 오후 6시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서울영상고교 2층. 10대 청소년들이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모여들었다. 180개국에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세계 e스포츠 왕중왕 대회 준결승전 현장을 보기 위해서다. 이 학교에서 e스포츠 전용으로 마련한 스튜디오 안은 10, 20대 젊은 관객 100여 명의 환호와 열기로 달아올랐다. 서우민(가명·18·고2)군은 “공부와 틀에 박힌 일상에 찌든 학생들에게 온라인 게임은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책”이라며 “놀이가 직업인 프로 게이머는 우리들의 우상”이라고 털어놨다.

대한민국 e스포츠의 사회경제학

우리 젊은 층은 왜 온라인 게임에 그토록 푹 빠졌을까. 그 열광의 도는 외국 청소년들 저리 가라다. 우선 우리 사회의 병리를 반영한다는 시각이 많다. 이장주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장은 “흥미진진한 가상의 세계에 몰두함으로써 고단한 현실에서 빠져나와 카타르시스를 얻으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숨 막히는 입시지옥과 뒤틀린 공교육·사교육 현장, 대학 나와도 일자리 얻기 어려운 ‘월수 88만원 세대’의 탈출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온라인 게임 세상은 지상낙원이다.

15일 오후 9시쯤 e스포츠 준결승전을 보고 몰려 나온 청소년들을 주변 전철역이나 버스정류장까지 따라가 봤다. 손이 곱을 강추위에도 길거리에서 쉬지 않고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려댔다. 지난달 수능을 봤다는 장호문(가명·19)군은 “개그 유행어 있잖아요. 1등만 기억하는 세상. 이런 데서 우리 소중한 벗은 게임”이라고 말했다. “어른들 보기에도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딴짓 하는 것보다 게임을 즐기는 게 낫지 않나요”라고 반문도 했다.

한국인 특유의 기질도 유별난 게임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한번 무슨 일에 꽂히면 너나 없이 달려드는 ‘쏠림’ ‘몰입’ 현상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초고속 인터넷이 깔린 ‘PC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청소년은 물론 젊은 직장인들까지 온라인 게임에 푹 빠졌다. 그 덕분에 넥슨 같은 세계적인 게임회사가 탄생하고, 세계e스포츠대회의 우승을 한국인 프로 게이머들이 휩쓸게 됐는지 모른다. 우리나라 특유의 빠른 손재주와 순발력 역시 온라인 게임 시장이 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게임이 사회병리를 보듬는 소극적 역할에서 벗어나 대안을 마련해 주는 적극적 도구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아주대 김민규(문화콘텐츠학) 교수는 “온라인 게임을 즐기며 자라난 이들이 차세대 디지털 콘텐트 산업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스포츠를 통해 지구촌 젊은이들과 호흡하고 소통하면서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를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게임 산업은 창의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분야다. 우리 산업이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 쪽으로 옮겨가는 데 순기능을 할 것이란 기대도 있다.
그래서 게임을 모르는 중장년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 간 인식의 격차를 좁히는 일이 시급하다. 이장주 연구소장은 “놀이문화를 볼 때 기성 세대는 나 홀로 수동적이고 일방향적인 재미를 느끼는 만화책 시대였다면 요즘 세대는 능동적이고 쌍방향으로 또래와 재미를 주고받는 온라인 게임 시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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