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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서 점심 하자던 박 선배, 한 달 만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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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서울에서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한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왼쪽)와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중앙포토]

그는 잘났고 훌륭한 사람이지만 결코 잘난 척하지 않는, 서민적 자세로 일관한 사람이었다. 내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처음 본 건 한국 포항제철 공장에서다.

1970년대 중반으로 기억하는데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95년 작고·76~78년 총리 재임) 총리와 함께 포항제철 관련 행사에 갔을 때다. 공장 입구에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이가 한 명 있었다. 공장에 온 손님들에게 일일이 “안녕하세요” “건강하셨죠” “고맙습니다”라고 친절하게 말을 건네 공장의 총무과장 정도 되는 줄 알았다.

행사가 시작돼 사회자가 “이제 사장님이 입장하십니다”라고 말해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작업복 아저씨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박태준씨가 사장이었던 것이다. 정말 깜짝 놀랐다. 그는 ‘대포항제철’을 만들어 운영했고, 나아가 경제계의 거두로 군림했고 정치인으로서 나라를 이끌어 온 리더였지만 도무지 그런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겸손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와세다(早稻田)대 선배이기도 한 그와의 추억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는 늘 “어이 이리 오지. 한잔하자” 며 나를 불러 귀여워해줬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80년대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로 한·일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였다. 대화로 풀려고 나와 미쓰즈카 히로시(三塚博·2004년 작고) 자민당 전 간사장이 한국에 갔을 때다.

사흘째 되는 날 도무지 한국 측과 의견 접근이 안 돼 “이제 내일 (일본에) 돌아가자”며 호텔로 돌아왔을 때 박 명예회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위로주나 사 주겠다고 해 “술 마실 기분이 아니다”고 거절했더니 굳이 나를 불러냈다. 미쓰즈카 의원과 같이 나갔더니 낮에 우리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격하게 붙었던 3당의 국회의원들이 다 술집에 나와 있는 게 아닌가.

그날 그 자리에선 술잔을 돌리며 낮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정말 기탄없이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술자리는 거의 아침까지 이어졌다. 공식적인 대화밖에 나누지 못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박 명예회장이 대화의 장을 마련해줬던 것이다.

 한 달 전쯤 그로부터 전화가 와서 “도쿄에 갈 테니 점심식사나 같이 하자”고 하길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총리와 함께 점심 약속까지 잡았는데 약속 날 이틀 전 “못 가게 됐다”고 연락이 왔다. 바빠서 그런가 하면서도 순간적으로 걱정이 돼 주변에 물어봤더니 “조금 피로하셔서 그렇다”는 말을 하길래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한·일 관계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의 빈자리가 너무 커 보인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일본 총리>

정리=김현기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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