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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我記宅處’] 건축의 도시 베를린, 김수근을 추모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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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는 건축의 도시로 불린다. 1871년에 발생한 대화재로 도시가 전소된 후 마천루의 도시풍경을 만들면서 20세기 세계건축의 중심도시 지위를 굳혔다. 지금이라면 어딜까. 단연코 베를린이다. 18세기 프러시아왕국의 수도가 되어 번창하기 시작한 이 젊은 도시는 정치지형의 격동적 변화와 함께 늘 새로운 기운이 감돌았고 이에 매료된 야심 찬 건축가들에 의해 도시풍경이 늘 바뀌어왔다.

 제국의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Karl Friedrich Schinkel·1781~1841)이 고전주의 건축으로 이 도시의 기반을 만들었다면 20세기 초에는 새로운 예술교육을 목표로 설립된 바우하우스가 모더니즘으로 그 기반을 다시 닦았다.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나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1886~1969) 같은 거장들이 그 중심에 있었지만, 건축에 밝았던 히틀러가 나치의 건축을 강요했을 때 그들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땅 미국으로 떠나 베를린의 건축을 전파하며 모더니즘을 만개시킨다. 폐허를 딛고 일어선 베를린은 이 미스를 잊지 않았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를 불러 미술관을 짓게 하는데 그는 조국에 20세기 건축의 최대 걸작을 선사하게 된다.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1893~1972)은 그 옆에 완벽히 새로운 개념의 베를린필하모니홀을 지어 베를린 건축을 세계 속에 강렬히 각인시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된 90년, 이 도시는 또다시 변모한다. 폐허의 제국의회 건물을 통일의회 의사당으로 재건했고 베를린 건축의 적자 악셀 슐테스(Axel Schultes·1943~)를 불러 총리 관저와 주변을 정리했으며 명망 있는 건축가들과 함께 붕괴된 베를린 장벽 부근에 각종 기념관과 도시 시설을 죄다 새롭게 했다. 특히 수도로 복권된 만큼 건축을 통한 국가 이미지 제고의 중요성을 인식한 나라들이 그 나라 최고의 건축가를 동원하여 현대적인 대사관을 다투어 지었다. 네덜란드는 당연히 렘 콜하스(Rem koolhaas·1944~)를 내세워 베를린 건축상까지 받게 했고, 프랑스·영국·미국 등이 크리스티앙 드 포잠박(Christian de Portzamparc·1944~), 마이클 윌퍼드(Michael Wilford·1938~), 찰스 무어(Charles Moore·1925~1993)의 건축을 통해 자국 문화를 알렸다. 특히 북구의 다섯 나라가 연합하여 지은 대사관은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라는 평을 받는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했을까? 2005년 나는 베를린에 초청받아 전시회를 열었는데, 여기를 오가면서 한국대사관의 신축이 진행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친 섭섭한 마음으로 누가 설계하는지를 알아보고 나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국대사관의 위치는 도심의 요지다. 그런데 설계는 한국의 건축가가 아니라 베를린에서도 이름이 낯선 현지 건축가가 맡았는데, 그 연유를 한국의 외교부에 알아본 즉, 대사관 땅을 어떤 부동산 소개소를 통해 매입하면서 받은 조건이 그 소개소가 건축가를 정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이럴 수가…. 이 사건은 베를린의 문화계에 냉소거리가 되었다.

 거의 모든 행정의 결과는 건축으로 남아 후세에 전한다. 그래서 건축에 대한 정부의 의식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우리에겐 그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국가에서 발주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턴키(Turn-key)라는 이름으로 건축가와 시공자를 짝짓기해 뽑게 한다. 세계에 유례가 없다. 검사와 변호사의 관계처럼 서로 감시하는 직능인 이 둘더러 한 팀이 되라는 것은 불륜을 노골적으로 저지르라는 말이어서 이를 맹비난했지만 그 먹이사슬은 너무도 완강하다. 이에 응하는 국내 설계업체는 시공사가 초청한 외국 건축가들의 하청업체를 자청하는 꼴이다. 그러니 그 근처에 가는 일이 비윤리적인 것으로 아는 나 같은 건축가는 국가 프로젝트를 할 재간이 없다. 또는 PQ(Pre-qualification·입찰 참가자격 사전심사제)라고 해서 큰 프로젝트는 경험이 있는 자에게만 준다고 하니 그렇다면 대통령은 해본 자만 하는가? 이를 바로잡으라고 국가건축정책위원회를 만들었더니 이름도 모르는 위원들로 채워 정부마저 무시하는, 있으나마나 한 위원회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러니 최근 민간에서도 용산국제업무지구 같은 엄청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모두 외국의 건축가들만 초청하며 우리 자신을 스스로 조롱하는 판국이라 우리의 변두리성은 헤어날 길이 없다.

 이런 한국 건축인데, 베를린은 올해, 25년 전 세상을 떠난 김수근(사진)을 초청하여 전시회를 열었다. 김수근이 누군가. 60년대 현대건축의 불모지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국가의 전폭적 지원 아래 불후의 명작들을 이 땅에 심은 거장이었다. 자유센터와 한국과학기술원은 당대 서구의 건축과 똑같은 초특급 현대건축이었고, 공간사옥과 경동교회는 외국 건축가들도 경외감을 갖는 걸작이다. 척박한 땅을 끌어안고 온몸을 불사르다 55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지금 세계에 남아 있는 걸작들이 그 건축가들 나이 70 즈음에 설계한 것을 상기하시라.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을까. 그런 김수근의 가치를 현대건축의 중심도시 베를린이 다시 인식하고 그의 업적을 재조명한 것이다. 오프닝에 참석한 한 건축평론가는 이런 놀라운 김수근의 유산을 받은 한국의 현대건축이 어떤지 내게 물었다. 무슨 말을 내가 할 수 있었을까.

 국가여, 한국 건축에 도움 주지 않아도 되니, 부디 방해는 하지 말라. 건축가·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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