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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질투의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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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괴담과 음모론이 어느덧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모든 것에 분노하는 2030세대. 그들은 방송인 A양의 충격적인 동영상조차 정권 음모론으로 접근한다. “더 센 걸로 가져와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디도스 사건을 묻기에 A양은 너무 약하다.” 물타기란 것이다. 2030세대는 꿈을 잃은 채 절망과 불만에 사로잡혀 있다. 여기에 일부 정치 세력들은 터무니없이 ‘식민지 대 애국심’의 대결 구도로 낡은 민족적 열등감까지 자극한다. 하지만 증오와 질투로 세대 간 갈등이 풀릴 수 없다. 특히 경제는 더욱 그렇다.

 경제학 원론에 따르면 금리를 내리면 소비가 늘고 저축이 줄어든다. 하지만 거품 붕괴 이후 일본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경기 부양을 위해 정책금리를 낮추자 오히려 저축이 늘고 소비는 줄어들었다. 고령화 시대의 역설이다. 불안한 노후에 대비해 금리가 떨어진 만큼 기를 쓰고 더 많이 저축한 것이다. 가계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일본의 민간소비는 쪼그라들었다. 경기부양책이 의도와는 달리 경기를 위축시켜 ‘잃어버린 20년’을 초래한 것이다.

 한국도 2030세대를 위해 경기를 띄우기 어려운 처지다. 재정 확대도 힘들고, 물가 때문에 기준금리 인하 역시 쉽지 않다. 여기에 내년 2~3월이면 유럽 재정위기가 절정에 이른다. 우리 경제성장률은 3%대, 새 일자리도 올해의 절반에 그칠 전망이다. 젊은 세대의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는 암울한 분위기다. 이런 때일수록 기성세대에 대한 증오보다 역(逆)발상을 주문하고 싶다. 한국은 여전히 가계부채보다 개인 금융자산이 훨씬 많다. 부동산도 노장년층의 독차지다. 이들이 돈을 꼭 쥔 채 소비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눈 밝은 2030세대라면 오히려 노장년 세대의 자산을 자연스럽게 시장에 끌어내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정의’를 앞세운 우리의 경제정책 중 현실을 왜곡시키는 대표적 사례가 상속세다. 원래 상속세는 소득세를 내고 모은 재산에 또 세금을 매기는 이중과세(二重課稅)다. 요즘 상속세 폐지가 세계적 대세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다 우리 상속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징벌적 장치로 둔갑했다. 세계 최고의 50% 세율에다, 최대주주 지분에는 30% 가산세가 붙는다. 이러니 돈을 꼭꼭 감추고, 편법상속이 꼬리를 문다. 이에 비해 유럽의 상속세율은 대개 30% 수준이다. 캐나다·호주·뉴질랜드·홍콩에 이어 싱가포르·스웨덴까지 상속세를 폐지했다. 누구보다 형평성을 강조하는 나라들이 왜 이럴까. 상속은 쉽게 하되 나중에 자본이득세를 거두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가혹한 상속세를 고집해온 일본은 반면교사(反面敎師)다. 죽을 때까지 자산을 꼭 쥐고, 상속을 꺼린다. 민간 소비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주머니가 얇은 일본의 젊은 세대가 방에 콕 박혀 살고, 관광지마다 노인들로 넘쳐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요즘 일본은 ‘상속세 저주’에 홍역을 앓고 있다. 경제주간지 『다이야몬드』는 ‘굿바이 일본’이란 기사에서 영주권을 받아 싱가포르·말레이시아로 떠나는 일본 부유층의 엑소더스를 소개했다. 엔화 강세에다 50%의 상속세율을 피해 자산 50억원 이상의 부자들이 가족 단위로 열도를 탈출한다는 것이다.

 요즘 한국 같은 분위기에서 상속세 완화를 꺼냈다간 몰매 맞기 십상이다. 야당은 물론 청와대와 여당마저 사회 양극화에 따른 민심이반을 추스르느라 ‘부자 때리기’가 한창이다. 혼자 잘나가는 수출대기업을 향한 질투도 도를 넘고 있다. 하지만 증오와 분노는 편법 상속과 지하경제만 부추길 뿐이다. 오히려 상속의 문턱을 합리적 수준까지 낮춰 꽉 잠겨 있는 거대한 노장년층의 자산이 자연스럽게 시장에 흘러나오도록 물꼬를 터야 한다. 그것이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가 늘어나고, 좌절한 2030세대에게 꿈과 희망을 되찾아 주는 길이다. 우리가 상속세 폐지에 반대한 미국의 워런 버핏에 열광하는 것은 너무 먼 나라 이야기다. 오히려 이웃인 일본의 상속세 실패에서 배워야 할 게 훨씬 많다. 증오와 질투 위에서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괴담과 음모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