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나라당, 책임 있는 태도 보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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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선거 방해와 투표 부정은 전형적인 전근대적 후진사회의 행태다. 21세기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 한나라당 의원실 9급 직원 공모씨의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디도스(DDos) 공격 사건은 정치권의 선거 부정에 대한 욕망이 여전함을 드러냈다. 정보화된 최첨단 사회에선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좀비PC 수백 대와 이를 제어할 노트북 한두 대만 있으면 쉽게 선거 부정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일깨워줬다.

 이번 사건은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한국의 후진적 정치행태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어서 허탈감을 준다. 특히 이 사건 공개 후 보여준 한나라당의 무책임한 태도는 실망감을 넘어 우리나라 여당 정치인들의 수준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낳게 한다.

 한나라당은 사건이 공개되자 “당이 직접 관계된 일이 아니므로 공식 대응은 않겠다”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 “한나라당은 상관이 없다”는 등의 변명으로 일관했다. 사건 공개 이틀이 지나서야 홍준표 대표가 “비록 국회의원 9급 운전기사가 연루된 것이지만 당으로선 국민께 죄송하다”고 마지못해 사과했다. 이번 사건은 민주주의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선거 부정 사건이다. 한 당직자도 말했듯이 당이 개입한 게 드러나면 당이 문을 닫아야 할 일이다. 이런 사건에 당 관계자가 연루됐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가장 먼저 통렬한 반성과 함께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과했어야 한다. 더 연루된 관계자가 없는지 스스로 색출하겠다고 나서고, 의혹을 한 점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정조사를 받겠다고 먼저 나서는 게 책임 있는 공당(公黨)의 자세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한나라당은 피의자들과 선 긋기를 하며, 책임을 회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민주당이 국정조사와 특별검사제 도입 요구에 나서자 마지못해 경찰 수사가 끝난 후 국조를 검토하겠다는 소극적인 모습이다. 홍준표 대표를 비롯해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자기 비서가 연루된 최구식 의원이 당직에서 물러난 게 전부다. 그저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무기력한 말만 반복하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을 두고 ‘선관위 내부자가 관련돼 있다’는 주장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다. 사건 개요밖에 발표되지 않은 경찰 수사를 놓고 벌써부터 각종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수사결과가 발표되더라도 괴담과 의혹이 꼬리를 물 것이라는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민심이반의 새로운 폭탄으로 등장한 것이다.

 설마 한나라당이 조직적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기획했을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혼자서 아무리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여도 꼬리 자르기라는 의혹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나라당은 회피만 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혐의를 벗을 수 있도록 외부의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그것만이 분노한 민심에 최소한이라도 부응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