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배신자’의 친구 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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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우덕
중국연구소 부소장

대만 타이베이 방문 첫날이었던 지난달 27일, 저녁 식사를 위해 한 한국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현지 사업가 이(李) 사장과 함께였다. 마침 TV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대만 퉁이팀 간 야구 경기가 벌어졌다. 삼성이 이기고 있었다. 경기를 지켜보던 이 사장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던진다. ‘차라리 졌으면 좋겠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야구는 대만의 국민 스포츠다. 500원(圓)짜리 지폐에 야구단 그림이 나올 정도다. 대만인들은 야구만큼은 한국을 꼭 이기고 싶어 한다. 그런데 번번이 진다. 단교(斷交) 때 가졌던 한국인에 대한 반감이 되살아난다. 대만 태권도 선수의 실격이 엉뚱하게도 반한(反韓)시위로 이어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현지에서 생활하는 이 사장으로서는 삼성의 승리가 또다시 반한 감정을 건드리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배신자’. 단교 20년,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배신의 앙금이 깔려 있다. 한국은 꼭 이겨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상황은 영 달리 돌아가고 있다. 대만의 소득 수준은 2000년대 들어 한국에 역전당하더니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 등 글로벌 기업을 보면 부러움을 넘어 시기심이 발동한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지금 대만에서는 한류 붐이다. 젊은 층은 소녀시대에 열광하고, 2NE1에 환호한다. 한류드라마는 대만 유선TV를 장악한 지 오래다. 겉으로는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하는 애증의 심리다. 중국은 위협적인 존재이고, 일본은 너무 앞서고 있고, 동남아 국가와 친구하기에는 자존심 상하고…. 그래서 더 한국과 친구 하고 싶다.

 그런데 정작 이 ‘배신자’의 머리에 대만은 없다. 오로지 중국뿐이다. 정치인들은 혹 중국에 밉보일까 걱정하며 대만 가기를 꺼린다. 중국 공산당도 대만 집권당과 손잡고 미래를 논의하는 마당에 말이다. 기업 총수들은 대륙을 드나들며 경영회의를 주재하면서도 대만에는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양안 자유무역협정인 ECFA로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대만은 중국·미국·일본에 이은 우리나라 4대 교역파트너다(통계상으로는 홍콩과 싱가포르가 앞서지만, 이 지역 수출의 대부분은 중계무역이다). 지난해 교역량은 약 285억 달러, 우리가 12억 달러 흑자였다. 우리가 대만에 비(非)메모리 반도체를 팔고, 메모리 반도체를 사오는 식이다. 균형과 보완의 완벽한 무역형태다. 일국양제(一國兩制) 정책이 준 기회다. 그럼에도 정치인과 기업 총수들은 ‘중국 바라기’가 돼 있다. 대만인들은 이를 ‘천박한 자본논리’라고 말한다.

 어쨌거나 대만에 우리는 ‘배신자’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머릿속에 지워졌던 대만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그게 한·중 수교 20년, 대만에 진 빚을 갚는 길이다. 지금 머뭇거린다면 150억 달러의 수출 시장과 친구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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