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여자도 힘 있어야 쿨하죠"

중앙일보

입력

★ 영화 속에 그려진 '남자' '여자'

〈남과 여〉(1962) 어스름이 깔리는 어느 일요일 저녁, 아이들 기숙사 앞에서 한 남녀가 만난다. 전 남편에 대한 아픈 기억으로 선뜻 남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여자. 삶에 대한 미칠 듯한 격정을 스피드로 해소하는 카레이서 남자.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수 어린 눈동자,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이들의 사랑.

〈페드라〉(1962) 남편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 아버지의 여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 금지된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페드라와 알렉시스. 결국 알렉시스는 아버지에게 사실이 발각되자 차를 몰고 절벽으로 향한다. 차 안 가득 울려퍼지는 'Goodbye John Sebastian', 그리고 알렉시스의 피맺힌 절규. '페드라~!'

★ 힘 있는 남자, 여자 우리는 쿨하다

김혜린 님의 동명 만화를 영화로 만든〈비천무〉가 얼마 전 개봉했다. 40억을 들인 영화가 설리와 진하의 뻔한 로맨스를 그리고 있든, 액션만 난무하는 한물 간 홍콩 무협물을 흉내내고 있든, 어린 시절 만화 〈비천무〉를 보면서 '멋진 남자'를 그려보지 않은 여자가 얼마나 될까? 또 오드리 햅번의 〈로마의 휴일〉, 줄리 앤드류스의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면서 '멋진 여자'를 꿈꾸지 않은 남자는 또 얼마나 될까?

남자와 여자가 이루어가는 세상인 만큼, 남녀 이야기는 영원한 테마일 수밖에. 건축가 김진애 님이 〈남자 당신은 흥미롭다〉(한길사 펴냄),〈여자 우리는 쿨하다〉(한길사 펴냄)라는 두 권의 에세이집을 내놓은 것도 이러한 이유일 터.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여자' '치마만 두른 여자' 등 김진애 님을 수식하는 말은 수없이 많다. 수식어만 봐도 거침없는 그이의 성격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영화광, 만화광, 미술광, 여행광이라지만 김진애 님은 무엇보다 사람광이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건축학의 기본이라고 하니 남자, 여자에 대한 책을 낸 것은 예정된 수순을 밟은 일일 것이다.

일 잘 하고 뒤끝 없는 프로지만, 시장통에서 아줌마들과 수다를 떤다 해도 멋지게 어울릴 영락 없는 '우리네 아줌마' 김진애 님을 그이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자, 먼저 인사들 하시고."
처음부터 거침이 없다. 인터뷰를 함께 하기로 한 출판 전문 웹진 부꾸의 기자 이우일 님과 통성명하라는 것이다. 남자, 여자 얘기를 책으로 펴낸 작가와 남자, 여자가 함께 인터뷰를 하면 내용이 더 풍부해질까? 슬그머니 기대가 된다. (* 부꾸 인터뷰 기사)

"건축가가 남자, 여자 얘기를 책으로 냈다고 하니까 다들 난리네. 뭐, 딴 이유 없어요. 남자, 여자 영원한 테마 아닌가요? 회의에서 남자들 뻔한 얘기 하는 게 지겨워서 좀 색다른 얘기를 써보자 생각했죠. 이왕이면 멋지고 쿨한 사람이 좋잖아요."

김진애 님이 대수롭지 않다고 풀어내기 시작한 이야기에서 그이의 책 한 귀절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멋진 남자: 멋을 만드는 멋있는 남자, 힘없음을 인정하는 힘있는 남자, 철듦과 철없음을 오가는 남자, 정에 약하면서 정에 강한 남자, 운명의 남자, '끼'를 발휘하는 남자.
*쿨한 여자: 질투와 애정을 함께 가질 수 있는 여자, 남성과 여성을 넘나드는 여자, 감정이 풍부하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여자, 권력과 권위의 의무를 지는 여자.
(〈남자 당신은 흥미롭다〉〈여자 우리는 쿨하다〉에서)

그이의 이미지처럼 이야기는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프롤로그에 실명을 거론한다고 해서 꽤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것 같아요. 좋은 이야기할 때만 실명이 나오던데요. 논쟁거리는 만들지 않겠다, 피할 건 피하겠다, 뭐 이런 식으로 보여요.
"나도 무지 썼다 지웠다 했죠. 나쁜 쪽으로 실명을 거론하려면 그 사람에 대해서 깊게 분석해야 되는데 그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적당히 매 맞지 않을 정도로만 썼죠."

-지난 4월에 나온 〈이 집은 누구인가〉(한길사 펴냄)는 참 신선하게 읽었는데 이 책들은 다소 가벼운 느낌이 들었어요. 실명을 적나라하게 밝히지 않은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은데요.
"가벼웠어요? 원래 대명제를 가지고 쓴 책은 아니니까.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쓰고 그 속에서 소재를 얽어매는 것도 내 마음이잖아요. 쉽게 읽히죠? 그러면 되는 거예요."

-〈남자…〉에 비해서 〈여자…〉가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던데요.〈여자…〉에서는 김진애 님의 개인적인 얘기가 많이 나와서 그런지 밋밋했어요.
"〈여자…〉의 원래 부제가 '나의 여자들'이었어요. 그리고 기획 의도부터〈남자…〉하고는 달랐죠. 여자의 사회의식 등 사회적 메시지는 아예 담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여자 얘기라서 칼을 쉽게 휘두를 수가 없더라고요. 남자한테는 칼을 쓰는 심정으로, 여자한테는 칼을 가는 심정으로 책을 썼다고 할까? 팔이 안으로 굽는 거 어쩔 수 없잖아요."

-멋진 남자, 쿨한 여자를 이야기하셨는데 결국 힘 있는 남자, 여자가 매력적이라는 의미 같은데요. 힘과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결국 힘이 있어야 되잖아요.
"정확한 지적이에요. 힘 없는 사람 어떡하겠어요? 물론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나 배경 등 세속적인 힘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목에서 힘 좀 빼고 진짜 힘을 기르라는 거지요. 실력이나 아름다움, 매력 등에서 개인적 힘이 나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은 기본이고요."

김진애 님의 삶처럼 속도감 있게 진행된 이야기가 한참 지났지만 그래도 묻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다.

전업주부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아줌마보다 건축가라는 타이틀이 먼저 붙는 그에게 덧붙여 물었다.

"전업주부는 점차 없어지겠죠. 농촌이나 재래 시장에 가봐요. 통계 수치에 안 잡혀서 그렇지 진정한 전업주부는 별로 없잖아요. 물론 가사 노동 존중해야죠. 그렇지만 가사 노동의 개념도 바뀔 겁니다. 남의 가정, 남의 아이를 돌보는 것도 일이에요. 미국에서는 아이를 봐주면서 '딴주머니' 차는 주부들 많아요."

김진애 님은 혼자서 먹고 살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이공계를 선택했다고 한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자기 앞가름 정도는 해야 된다고. 여기에 남녀의 구분이 있을 리 없다.

여자라서 자본주의가 좋다는 김진애 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일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자만큼이나 여자에게도 성공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뜻이리라.

"길거리 간판쟁이와 저를 비교한다고 해도 기분 안 나빠요. 그게 뭐 중요한가요?" 김진애 님은 자신있게 말하고 행동한다. 김진애 님이 말하는 쿨한 여자는 바로 자신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힘을 조절할 힘을 아예 부여받지 못한 수많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 어느 성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한여름 무더운 열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화 속에 그려진 '남자 아닌 여자' '여자 아닌 남자'

〈해피 투게더〉(1996)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뒷골목 빈민가에 있는 작은 바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남자. 그리고 바에 오는 손님들의 춤 상대를 하는 또다른 남자. 낡은 호텔의 침실에서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는, 뿌리 뽑힌 채 영원히 떠돌아 다니는 이들 두 남자. 이들에게 희망은 있을까?

〈크라잉 게임〉(1996) 클럽에서 '크라잉 게임'을 노래하는 미모의 흑인 여가수에게 매료되어 매일 그녀를 찾아오는 남자.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여자보다 더 여자다운 흑인 여가수. 자신의 성기를 보고 구토를 일으키는 남자를 향해 싸늘한 분노를 터뜨리는 남자 아닌 여자. 이들의 '크라잉 게임'은 끝날 수 있을까?

오현아 Books 기자(perun@joins.com)

▶이 글에서 이야기한 책들
* 남자 당신은 흥미롭다 (김진애 지음, 한길사 펴냄)
* 여자 우리는 쿨하다 (김진애 지음, 한길사 펴냄)
* 이 집은 누구인가 (김진애 지음, 한길사 펴냄)

▶이 글에 나온 영화들
* 남과 여
* 페드라
* 비천무
* 로마의 휴일
* 사운드 오브 뮤직
* 해피 투게더
* 크라잉 게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