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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 같은 인생 죄 짓지 마시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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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올해 여든 나이의 무녀 김금화는 국내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등 세계를 돌며 굿 판을 벌인다.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그는 지난 60년 세월 동안 수많은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해주고, 화해자로서 굿 마당을 펼쳐왔다. 최근에는 그를 소재로 한 단편영화 <그날>이 개봉됐다. 그는 요즘의 팍팍한 우리네 인간사를 어떻게 바라볼까? <월간중앙>이 거제도 금수사 산신제에 참가한 그와 1박2일 동행하며 그 물음의 답을 좇았다.

뒤에 물러 누운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질펀히 흘러내리는 검은 강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아져 내릴 듯한 파아란 별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다. 강가 모랫벌엔 큰 차일을 치고, 차일 속엔 마을 여인들이 자욱이 앉아 무당의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다. 그녀들의 얼굴들은 분명히 슬픈 흥분과 새벽이 가까워 온 듯한 피곤에 젖어 있다. 무당은 바야흐로 청승에 자지러져 뼈도 살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이 쾌자자락을 날리며 돌아간다…….(김동리의 ‘무녀도’ 중)

종이 꽃으로 장식한 붉은 모자를 쓰고 붉은 치마를 입은 새하얀 얼굴의 무녀가 흰 버선발로 맴을 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사뿐한 그 발 끝이 새처럼 가벼워 보인다. 양 손에는 오색 천을 감싸 쥐고 높낮이 없는 차분한 곡을 내뱉기 시작하는 데 그 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그의 주변으로 합장한 여인들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올린다.

10월 29일 오후 거제도 석포리 금수사에서 열린 산신제 굿의 한 장면이다. 1936년 김동리가 발표한 <무녀도>의 한 장면이 7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대한민국 거제도의 산속에서 고스란히 재현되는 듯했다.

이 굿을 관장한 사람은 인간문화재 김금화(80) 씨. 그는 한국의 굿을 세계에 최초로 알린 ‘대한민국 대표무당’으로 무형문화재인 ‘서해안 풍어제’(서해안 배연신굿, 대동굿)의 기능 보유자다. 김씨는 산신제를 진행해 달라는 금수사 주지스님의 요청을 받고 서울에서 내려와 신 딸들의 굿을 주관했다.

그는 굿이 열리기 직전에 산꼭대기에 마련된 산신각에서 기도를 올리고 신 딸들과 악사 일행을 이끌고 산을 내려왔다. 기자가 그 뒤를 따르며 바라본 무녀와 악사들의 풍경은 신산스러움과 함께 뜻 모를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심장의 고동소리 같은 북소리와 함께 낮게 울리는 징소리, 그리고 애잔한 바라(제금) 소리가 무녀들의 길다란 오색 치마자락에 감기는 듯하자 아주 먼 옛날,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그 이전의 태곳적 소리와 풍경이 되살아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무당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는 사람”

무녀는 저 생과 이 생의 매개자 역할을 한다고 한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60년 영매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김씨는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은 건 절집에서 하룻밤을 세우고 산신제 준비로 분주한 아침 시간이었다. 그는 보살님들이 내온 두부 된장국과 나물 반찬들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운 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일행들은 이날 하루 종일 진행할 굿을 위해 벽에 휘장을 치고 그림을 붙이는 등 손길을 분주하게 놀렸다.

그는 올해 나이가 팔순인데도 허리가 꼿꼿하고 눈빛이 형형해 첫 대면에는 약간의 두려움마저 생겼다. 하지만 몇 마디 말이 오가다 보니 소녀 같은 수줍음과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머니의 푸근함이 전해져왔다.

간밤에 잘 주무셨나요. 서울(그녀는 이문동에 산다)에서 오는 데 피곤하셨을 텐데요.

“푹 잤어요. 지난밤 꿈결에 분홍 치마에 저고리를 입은 여자가 보이더라고. 그래서 속으로 ‘아 이 산에는 여 신령이 사는구나’ 했지요.”

진짜 신이 보이시나 봐요. 신기하기도 하지만 두려운 생각도 들어요.

“(웃으며) 그러니까 무녀지. 신이 내 앞에 떡 하니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꿈 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굿할 때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목소리만 들리기도 하지. 무당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잖아. 우리는 양 쪽 세상을 넘나들며 인간도 보고 신도 만나고 하는 겁니다.”

절에서 산신제를 한다니 좀 의외였어요. 부처님을 모시는 절에서 종종 굿을 하기도 하나요?

“굿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입니다. 불교 역시 우리 민족과 가장 긴 역사를 거쳐온 종교니까 서로 융합이 되기도 하는 거지. 이전에도 어느 절의 주지 스님이 아파서 굿을 한 적이 있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도 종종 이런 일이 있습니다.”

산신각에서 산신제를 마치고 내려오는 모습(왼쪽). 산신제에 함께 온 김금화 씨의 신 딸이 굿을 하고 있다.

김씨는 1931년 음력 8월 18일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 ‘박쿠니’(朴厚)에서 태어났다. 초가삼간 농갓집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넘세’다. 그의 자서전 <비단꽃 넘세>에 따르면 입 하나 덜자고 열넷 나이에 일찍 시집을 갔다.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3년 만에 친정으로 쫓겨 왔다가 17세에 신이 내려 무당이 됐다. 일제 말기와 6·25전쟁 등 굴곡진 역사를 거쳐온 그녀는 무녀였기에 보통사람들의 삶보다 더욱 힘겨운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넘세’란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우리 어머니가 언니를 낳고 저를 낳았는데 집안에선 아들을 원했어. 그래서 남자로 태어날 동생이 ‘넘석한다’(어깨 너머로 들여다본다는 뜻)고 나를 ‘넘세’라고 이름 붙인 거야. 내가 열세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큰집에서 ‘넘세’라는 이름이 촌스럽다고 ‘금화’라는 새 이름을 지어줬지요.”

열일곱 살에 내림 굿 받아

시집살이가 심하셨나 봐요.

“옛날에야 거진 다 그랬지 뭐. 아직까지도 손으로 더듬어보면 눈썹 주위에 주걱으로 맞은 흔적이 남아 있어. 신랑은 나보다 세 살 위였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천방지축이었지. 시어머니가 막 두들겨 패고 밥도 굶기고 하니까 무서워서 못 살겠더라고. 그래서 도망친 거지. 그러다 친정으로 와 지냈는데 언젠가부터 괜히 옆에 있는 사람들 보고 쑹얼쑹얼 대더라고. 산모 앞에서는 “이번에 아들 낳아” 하고 친구한테는 “너희 아버지 죽는다” 하면서 말이 막 터져 나오는 거야.”

그러다 내림굿을 받았군요. 신을 받으셨을 때 일이 아직도 기억나시나요?

“그럼요. 열일곱 살 정월 보름이었어. 몸이 아파 집에 누워 있는데 이모할머니께서 나한테 달맞이를 갔다오라는 거야. 내 고향인 황해도에서는 길다란 조짚을 추려서 자기 나이에 맞춰 매듭을 만들어 달맞이대를 만들거든. 거기에 불을 붙인 뒤 달을 보면서 내 나이만큼 절을 하는데 ‘제발 아픈 몸을 낫게 해 달라”고 빌었지.

다 탄 달맞이대를 내려놓고 그 위를 건너뛰는데 갑자기 내 몸이 이상한 거야. 갑자기 하늘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나서 쳐다봤더니 별 같은 게 마구 쏟아지고, 머릿속에서는 다닥다닥 돌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라고. 한동안 도망 치다가 개울에서 정신을 잃었어. 내 몸에 신이 내린 거지. 그 후로 집에 있다 갑자기 뛰쳐나가 온 동네를 들쑤시며 “쇠붙이 내놔라”, “성수 내놓으라”고 하고 다닌 거야. 나중에 결국 큰 만신이셨던 외할머니께 내림굿을 받았지. 그리고 일년 후 차츰차츰 손님이 들고나면서 소문이 났는데 열아홉 살 되니까 대동이 나더라고요.”

대동이 났다는 게 뭐죠?

“마을에서 나한테 대동 굿을 해달라고 한 거야. 대동 굿은 온 마을의 신을 모시는 겁니다. 마을 전체의 안녕과 번영을 구하는 큰 축제지. 그때까지 한 번도 대동 굿을 본 적이 없는데 나한테 하라고 하니 외할머니께 “어떻게 하느냐”고 여쭈었더니 “걱정하지 마라. 만신들이 나타나면 다 하게 돼 있다”고 말씀하셔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진짜 저절로 하게 되더라고. 그 전까지 목이 쉬어서 제대로 굿을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시작하니까 공수(신이 인간의 입을 빌어 의사를 전달하는 일)를 주는 데 못도 툭 터지면서 저절로 잘하게 됐어.”

전쟁 통에 고초를 많이 겪었다면서요?

“피란을 가지 못했는데 인민군이랑 빨치산이 와서 “미신행위 하는 사람 다 나오라”고 난리를 쳤지. 피해를 안 보려면 무슨 여성 부반장 같은 것을 하라고 해서 했는데 나중에 인민군 물러나고 우익 청년들이 빨갱이 노릇했다고 나를 족쳤지. 그 사람들한테 끌려가서 죽을 뻔했는데 어찌어찌 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어.”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피란 와서 살던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또다시 박해를 받았다. 무속인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는 이유로 마구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손 사래를 치며) 아이고 말도 말아. 그 시절에는 경찰서에 수십 번도 더 들락거렸을 거야. 굿하다가 잡혀 들어가고를 수없이 반복했지. 건달들도 우리 집에 찾아와 돈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갈고리로 장구 찍고 난리를 쳤어요. 그럼 어쩌겠어, 돈을 줘야지 배길 수 있겠어?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무당 때려치우고 다른 일도 잠깐 해봤지만 이것이 정해진 운명이라 어쩔 수 없더라고.”

1982년 그녀는 미국 녹스빌에서 열린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공연에 초청을 받으면서 그동안 무녀라서 감수해야 했던 온갖 설움을 씻게 된다. 하버드대 건축학과 출신의 민속문화 연구가 고 조자용 씨가 이 행사에 김씨 일행을 초청하면서 예술인으로 인정받게 한 것이다. 1960년대에 서울에 ‘에밀레 박물관’을 열어 관장을 지냈던 조씨는 평소 한국의 민속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이다.

“조 선생의 제안을 받고 너무 좋아서 며칠 동안 잠을 설쳤어요. 그런데 나중에 조 선생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무당 굿을 한·미 수교 백주년 기념공연에 내보인다는 건 국가적 망신’이라며 추진위원장이 몹시 화를 냈다는 거야. 다행히 조 선생이 우리 일행을 미국으로 부르기 위해 끝까지 노력을 했고 KBS <월요기획>을 통해 방영된 내 굿을 본 스미소니언 박물관장도 방문을 간절히 요청해와 우여곡절 끝에 미국행이 성사됐어요.”

당시 굿을 본 미국인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무대에 오르자마자 이상하게 신명이 솟구치기 시작했어요. 두 발이 땅에 닿는지 허공을 나는지 구분 안 될 정도로 몰입의 경지에 올라 작두를 타고 춤을 추기도 했지. 그런데 의외로 객석이 너무 조용한 거라. 질끈 감았던 눈을 떠보니 이게 웬일이야! 야외까지 무대를 터놔서 6000석에 가까운 객석에서 순간 우뢰 같은 박수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지. 나도 흥이 나서 무대에서 내려가 구경하던 사람들을 무대 위로 올리고 서로 어울려 춤을 췄지. 한국 만신 중에 외국에서 작두를 탄 건 아마 내가 처음일 거야.”

독일인 안드레아는 최초의 외국인 신 딸

그는 미국 공연 이후 엄청난 유명세를 치렀다. 1993년 일본 NHK 방영, 1994년 호주 시드니 등 5개 도시 순회 공연, 1998년 독일 베를린 코리아 페스티벌 공연, 2002년 서해안 풍어제 미국 순회공연, 2006년 러시아 세계 한민족포럼 공연에 참가하는 등 세계를 돌며 우리 전통 굿을 알려왔다. 그때마다 외국인들의 반응은 기대를 뛰어넘었다.

세계인들이 우리 굿에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요?

“하나님도 있고 부처님도 있고 만물에 신이 있지만 태양 아래 바람 아래 인간은 하나니까 같이 공감하고 울 수 있는 거지. 유럽에는 정신치료사가 굉장히 많아요. 내가 볼 때는 그 사람들이 다 무당이야. 한국 사람들은 무병을 앓는다고 하면 겁부터 내고 피하고 정신병원 가고 거부하잖아.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즐기더라고. 일반인들도 굿 가락에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 신기해. 굿을 하다가 그들에게 헝겊 조각을 하나 줘도 그걸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게 그 사람들이야. 굿판이 끝나도 자리에서 안 일어나고 붙들고 우는 사람도 많다니까.”

신 딸, 신 아들도 많으시지요. 모두 얼마나 되세요?

“대략 70~80명은 될 거야. 다 나한테서 내림 굿을 받진 않았지만 일부는 내 이름을 보고 배우러 온 사람도 많았어. 그중 채희아가 떠올라요. 서울대 음대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미국 남가주대(USC)에서 세계의 민족 춤을 공부한 여성인데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갑자기 신병이 났어. 유학 중에 한국에서 누군가 자꾸 자기를 부르는 느낌이 들어서 귀국했는데 황해도 굿 영상을 보다가 갑자기 발작을 했어요.

그러고 난 뒤 나를 찾아왔는데 보자마자 신이 내린 걸 알겠더라고. 당시 서울 석관동 우리 집에서 내림굿을 받았는데 민속학자인 고 임석재 교수와 사진기자 김수남 선생도 오셨어요. 그때는 내림 굿 받는 사람이 없어서 큰 화제가 됐어. 그 내림 굿 장면이 KBS 방송에 나왔는데, 무엇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 신이 내렸다는 점 때문에 무속과 무당을 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어. 채희아는 지금도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샤먼을 연구하고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이고 있어요.”

외국인 출신 신 딸도 있다고 들었어요.

“2006년 내림 굿을 해준 독일 여성 안드레아가 내 신 딸입니다. 안드레아 소개로 최근에 하와이에 가서 아프리카계 영국 왕실 변호사도 내림 굿을 해줬어. 그 사람도 내림 굿을 하면서 춤을 추는데 나보다 더 잘 추더라고. (웃음)

김금화의 이름 앞에는 늘 ‘나라 만신’이란 호칭이 붙는다. 개인 굿거리 말고도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빌어주는 무녀라는 의미다. 1985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뒤로 국가적 행사에 자주 불려 다니면서 붙여진 수식이다.

1998년엔 임진각에서 통일맞이 굿을 했지요?

“1996년 베를린으로 굿 공연을 하러 갔다가 독일의 통일 현장을 보고 나서 직접 기획했어요. 나도 실향민이라서 이 굿을 준비하는 감회가 남달랐지. 그 행사를 할 때 소설가 황석영 씨가 국회의원들을 초청하면서 내 굿을 알리는 데 많은 도움을 줬어요.”

역대 대통령의 추모제도 도맡아 하셨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무녀라고 박해를 받긴 했지만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 뒤 내가 추모제를 해드렸지.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도 그쪽 참모분에게서 추모제를 해달라는 연락이 왔는데 예정된 해외 공연이 있어 못해드렸어. 국가적으로 큰일이 있을 때마다 자주 불려 나가지.”

로마에서 굿 공연은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었다는데.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시고 그 달에 로마대학 앞에서 굿을 했어요. 선종하신 교황님, 좋은 데로 가시라고 기도했지. 그곳에 온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따라줬더니 그들이 손으로 술을 찍어 사방에 뿌리면서 따라서 해. 나도 같이 뿌리고 같이 마시면서 덩실덩실 춤을 췄어.”

“남의 고통 끌어안고 사는 게 만신의 고통”

김금화씨는 미래가 불안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해 복을 지으라"고 말한다.

민속학자이며 세계적인 ‘무당 박사’인 고 서정범 교수는 생전 무(巫)의 범주를 ‘국가 통치자인 왕과 장군, 의사, 약사, 가수, 탤런트, 배우, 무용인, 음악가 등 예술가 그리고 모든 종교인’으로 규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무녀 김금화’도 ‘예술인 김금화’로 확장해 생각해볼 수 있다. 금수사에서 열린 열두 마당 굿도 어떤 오페라나 서양의 뮤지컬보다 처연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우리 민족의 기본 색인 오방색 무복 차림의 무녀들의 춤사위를 지켜보다 보면 저것이 단순한 종교의식인지 예술무대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홀감에 사로잡히게 됐다.

춤과 공수는 따로 배우는 건가요, 저절로 몸에서 나오는 건가요?

“자꾸 따라 다니고 신 어머니가 하는 것을 보고 듣다 보면 저절로 이루게 돼요. 나도 무당이신 외할머니께 많이 배웠지. 그런데 요즘 젊은 무속인들은 공수를 하는데 너무나 멋이 없어. 마음 속에서 우러나면서도 깊이 있는 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애기처럼 그냥 “대대대대” 하면서 목에서만 나오는 소리로 가락도 없이 하거든.

굿도 예술이고 우리 국악의 뿌리인데 아무런 성의도 없이 하면 앞으로 보존이 되겠어요? 요즘 내가 굿을 많이 안하고 밑에 있는 신 딸, 신 아들에게 기회를 자주 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야. 자꾸 해보고 들어 봐야 알지. 우리 굿 거리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도 내 중요한 일이야.”

만신으로 60 평생을 살아오셨는데 만신이 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뭇 사람이 참지 못하는 고통을 숱하게 참아 내는 거지. 내가 내림 굿 받던 날 신 어머니인 외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꼭 붙들고 이렇게 말했어.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대신 짊어져야 하는 고통,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사가 되어야 하는 고통, 인간과 신들 사이를 매개하고 화해를 청하는 책임의 고통을 떠안고 사는 게 만신의 고통”이라고 말이야.”

달나라에 가는 세상이 됐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당을 찾습니다. 그 이유는 뭐라고 보나요?

“예전에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장독에 물 떠놓고 빌고 하늘 쳐다보고 빌고 했지 않아요? 그게 바로 생활 무속인거지. 예전엔 아프면 병원부터 찾는 게 아니라 할머니가 접시에 물 들고 다니고 된장 쒀서 버리고 죽 써서 버리면서 빌었잖아. 할머니가 그 집안의 무당 역할을 한 거야. 이제는 모두 사라졌지만 그것들이 우리 민족의 잠재의식에 남아 있어서 일부 사람은 그 기도의 힘을 여전히 믿는다고 봐.”

보통 ‘신기’라고 하죠? 현대 과학으로 도무지 설명이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뭔가요?

“14년 전의 일인데 어느 날 아이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 왔어요. 아이가 원인 모를 병으로 앓고 있는데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나한테 전화를 했다는 거야. 그 아이와 내가 인연이 있으려고 그랬는지 그 전날 꿈을 꿨어. 까마득한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겠구나’ 생각하고도 저 편으로 껑충 뛴 겁니다. 그랬더니 아주 넓은 평야가 펼쳐지더라고.

그래서 내가 새파란 잔디를 막 뛰어다니고 그랬어. 그래서 나는 그 아이가 살 줄 알았지! 그 전화 받고 “애는 자고 있는 거고, 괜찮아 질 거다”라고 말해줬어요. 병원은 이미 뇌사 진단을 내렸던 때였거든. 그런데 진짜 그 아이가 며칠 뒤에 깨어난 거야. 그 병원이 유명한 대학 병원인데 그때 의사도 병명을 몰라 나중에는 얼마나 답답했는지 무당에게 가보라고 얘기했다고 해요.(웃음) 그 아이가 지금 스물여섯 살이야. 요즘도 가끔 나한테 찾아와요.“

“사람이 은혜를 모르고 살면 벌 받아”

김씨는 ‘무녀’인 동시에 정신적인 상처의 치유자라고 할 만하다. 그녀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걱정과 근심,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찾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녀는 그들의 걱정을 직접 들어주고 달래주며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준다.

“무당은 신과 사람 사이의 매개자예요. 사람의 편에 서서 신을 설득하고 달래고 사정하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신에게 전하기도 하고. 신의 세계에 들어서려면 무엇보다도 나를 버려야 하거든. 사람들의 걱정을 들어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담사가 돼요.”

60년 동안 점을 보고 굿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사연도 제 각각일 듯하다. 농경사회로부터 시작해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까지 굿을 해왔으니 그가 겪은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할 수 밖에 없다.

“옛날 내가 고향에 살 때는 다들 농사짓는 사람이었잖아. 풍년 들고 집안 평안하게 해달라는 소원이 거의 전부였지.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 사업 잘되게 해달라, 아이를 유학 보내는 데 학교가 괜찮은지를 물기도 해요. 또 왜 그렇게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지 묻는 부인도 많아요.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정신분열증으로 찾는 사람도 많아요.”

마음의 병을 고치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씀해주시나요.

“욕심이 많아 생기는 병이니 마음을 넓게 펴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하지. 아무리 힘든 시절도 곧 지나가고 좋은 일이 올 거라 생각해야 해요. 긍정적 마음가짐을 가지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복은 오게 돼 있거든.”

요즘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삶은 꿈결같이 금방 지나가니 영원히 사는 내세를 생각해 바른 일을 하고 살아야 해요. 내세를 생각하면 아무렇게나 살면 안되지. 예전에 비해 요즘 세상은 살기가 너무 각박해졌어. 자기를 낳아 준 부모를 몰라보고 내다버리는 불효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잖아. 예전엔 드물던 일이 이제는 너무 자주 일어나니까 안타까워요.

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안돼. 착하게 살아야 복이 오는 거야. 당장 눈 앞의 이익에 욕심 내고 제 살 궁리나 하면서 남을 중상모략하고 거듭 욕심을 부리면 벌을 받는 거라고. 복은 누가 갖다 주는 게 아니라 지어서 받는 거야. 그래서 ‘복을 짓는다’고 말이 생겨났잖아. 옛날에는 복이든 죄값이든 후대로 갔지만 지금은 당대에 받는 거야. 시간이 빠르니까.”(웃음)

평생 숱한 사연을 담은 사람들을 만나와서 그럴까? 그는 측은지심이 강하고 정이 넘쳐 보였다. 절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마다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물었다. 그는 기자에게도 시종 일관 “밥은 잘 먹었나”,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았나”, “돌아가는 길이 고생스러울 텐데 조심해야 한다” 등 인사말을 이어갔다.

겨우 하루를 같이 지냈을 뿐인데 헤어질 때는 두 손을 꼭 잡고 고향집의 어머니처럼 아쉬워했다. 사람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신산스러운 삶과 고통이 가져다준 산물일지도 모른다. 지나온 삶이 얼마나 고달팠던지 그는 옛 이야기를 돌이킬 때면 가끔 울먹이기까지 했다.

“나도 살아오면서 애로가 많았어. 굉장히 많았지. 남동생이 일찍 죽고 조카 사남매를 키우신 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내가 처음 볼 때는 쌀쌀맞고 냉정해 보일지 몰라도 온갖 풍상을 다 겪어온 터라 도가 텄어. 하늘 아래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다 감싸 안고 싶은 거지.”

중요무형문화재인 서해안 풍어제의 전수자로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석학이 그를 찾기도 했다.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도 1980년대 중반 한국을 방문해서 그를 만났다.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로 돌아간 뒤 김씨를 만난 느낌을 주제로 ‘한국의 샤머니즘’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밖에 도올 김용옥, 사진작가 고 김수남, 무용가 홍신자, 영화배우 김지미, 소설가 황석영 등 다양한 문화 예술인들도 그녀와 인맥을 쌓았다.

무속인으로는 최초로 대학 강단에 서기도

도올은 “금화가 말하는 무속의 세계야말로 우리 민족의 예술과 종교의 원형이라는 것을 설파했다”고 말할 정도로 김금화 예찬론을 폈다. 1982년 고려대 교수시절 도올은 무속인 가운데 처음으로 그를 철학 교실 강단에 세웠다. 김씨는 “반독재 투쟁이 한창이던 그 시절에도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요즘도 이문동 김씨 집을 수시로 찾는다는 도올은 김금화에게 다음의 애송시를 남기기도 했다.

칼과 작두가 마구 휘날리는데 / 날렵하고 훤출한 그대의 / 그림자가 드리운다 // 그대는 어쩌자고 무당이 되었나 /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 그 냉가슴이 있었겠지 // 그대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 흐느끼는 한민족의 혼들을 위로하네 // 그 누가 그대의 세계를 알리 / 영원한 동경의 세계 (도올 김용옥이 김금화에 바친 시, 1982년)

지금은 고인이 된 김수남 사진작가도 인연이 깊다. 한 평생 무속인들을 카메라에 담았던 김 작가와의 마지막 만남을 그는 또렷이 기억한다.

“김 선생이 술을 많이 자셨는데 내가 항상 선생을 보면 그랬지. 술을 한잔 잡수면 불로초요, 두잔 석잔 마시면 사약입니다. 그러니 한잔만 드세요. 그래도 술을 그리 좋아하시더라고. 어느 날 양평 전시회를 한다고 초청해서 갔더니 또 술을 드시고 계시길래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며 ‘선생님, 또 술이에요?’ 했더니 그냥 웃으시더라고.

그리고 해외로 사진을 찍으러 가신다 길래 그날 따라 이상한 생각이 들어 ‘선생님 안 가시면 안돼요?’ 했더니 ‘가야 한다’는 거야. 그때 더는 못 말렸어. ‘저 사람이 저렇게 가셨다가 잘 돌아 오실까’ 라는 마음이 들어 불안했는데 아니나 달라 그 길로 돌아가셨잖아. 그런 게 있어. 안 가면 안 되는 길, 그럴 때는 아무도 못 말리지.”

황석영 작가와는 1980년대 초반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장산곶매’ 책을 출판할 때 공연을 해주며 인연을 맺었다. 1970년대 톱스타였던 배우 김지미 씨는 무녀와 관련한 영화 촬영을 할 때면 그를 찾아와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지난 10월 2일에는 무용가 홍신자 씨와 ‘제주도 7대 자연경관 선정’ 기원 특별공연을 열기도 했다.

“홍 선생과는 5년 전에도 함께 공연한 적이 있어. 얼마 전 홍 선생이 독일 양반하고 결혼하셨잖아. 이 분이 굿을 너무 좋게 생각하시더라고. 제주도 공연 때도 따라 오셔서 박수 치고 함께 춤을 추기도 했어. 바람이 너무 심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지만 구경꾼이 너무 많아 신명 나게 끝을 냈어.”

강화도에 세워진 ‘금화당’은 김 씨가 서해안 풍어제와 대동 굿에 담긴 문화적 요소를 연구·보전하고자 지은 무속 박물관이다. 그녀는 이곳을 발판으로 세계 여러 나라와 민속 연구를 통한 국제 교류사업을 벌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금화당에 외국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데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해요. 서해안 풍어제를 문화재로까지 지정했으면 사진이라도 담아가게 해줘야 하는데 제대로 갖춰 놓은 게 없거든. 지난해 내가 하와이에서 유럽 사람, 미국 사람 열 명 정도에게 굿을 해줬는데 우리 돈으로 1000만원 정도를 벌었더라고. 올해에도 7000~8000달러를 벌었는데 무당의 외화벌이도 쏠쏠하잖아! 굿을 우리 민속 문화의 한 장르라고 여기고 정부가 무속 문화를 보존하는 데 좀 더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내년은 총선도 있고 대통령도 뽑는 해다. 나라의 큰 일을 앞두고 ‘나라 만신’이 점치는 내년 운세가 궁금해 묻자 구체적 정치 얘기는 미뤄놓은 채 국운을 얘기를 늘어놓는다. 애정이 담긴 덕담도 잊지 않았다.

“난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무당이니(웃음) 정치엔 관심 없거든. 가끔 선거철 되면 정치권에서 사람을 보내 물어 오기도 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천기누설이라 함부로 말을 안 해요. 다만 큰 국운만 보면 내년은 좀 시끄럽고 굴곡도 많은 해라 잘 헤쳐나가야 해요. 음력으로 6~9월에 큰 재난 사고가 점쳐지니 국가적으로 안전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좋습니다. 내년이 어렵고 힘든 해라도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기운이 들어옵니다. 빈곤한 사람은 내년과 후년에 많은 도움이 되는 해니까 복을 많이 지으세요. 내년은 아픈 사람도 많이 건강해지는 해입니다. 모두들 착하게 사세요.”

박미숙 기자 splanet88@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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