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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의 금요일 새벽 4시] “망가져야 뜬다니까 … ”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4면

◆‘아무 데서나 찍어도 그림엽서’라는 로마에 다녀왔습니다. 경제위기로 어려운 이탈리아지만 로마는 문화유산들의 존재감에 둘러싸여 여전히 여유와 낭만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출장 목적은 ‘펜디’의 마이클 버크 CEO와의 인터뷰. 그런데 그는 너무 바빴고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은 너무 많았습니다. 인터뷰 전날, 펜디는 이탈리아 장인들을 본사로 초대해 만찬을 열었습니다. 그 답례로 우산 장인인 마리오 타라리코는 맞춤 제작한 우산 두 개를 선물했고, 주류 장인은 전통 그라파(이탈리아 브랜디)를 내놨죠. 화통한 성격의 버크 사장은 손님들 사이를 오가며 건배했는데, 마침 제 옆에 앉은 주류 장인과 친분이 깊어 샴페인 대신 그라파로 연거푸 건배했습니다. 저도 지지 않았죠. 독주는 건강에는 안 좋아도 빠르게 친해지기에는 좋은 음식이죠. 한국이나 이탈리아나 똑같더라고요. 다음 날, 아니나 다를까 기자들 사이에 인터뷰 시간 쟁탈전이 벌어졌고 제 옆에는 엄청난 영어 실력의 인도 여기자가 다가와 섰습니다. 중간 과정은 생략입니다. 버크 사장은 ‘그라파 동지’였던 제 얼굴을 알아보고 의리(?)를 지켰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브라만(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고 계급) 인도 기자가 꽤 골이 났다는군요. 뭐, 좀 미안하긴 했지만 자기가 브라만이면 저도 단군왕검 직계니까요. 전날 과음으로 힘들었을 텐데 충실히 응해주신 버크 사장님, “그라치에(감사합니다)!” <이소아>

◆디자이너를 만날 땐 뭐라 불러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대표님·사장님·교수님이라면 이름 없이 직함을 부르면 되는데 그게 마땅치 않은 탓이죠. 카스텔바작을 인터뷰할 때 또 이런 문제에 맞닥뜨렸습니다. 저는 그냥 ‘바작’이라는 호칭을 택했습니다. 그의 정확한 이름은 ‘장샤를 드 카스텔바작’입니다. 그런데 브랜드 이름이 ‘카스텔바작’이다 보니 깜박하고 이름이 카스텔, 바작이 성인 걸로 착각한 겁니다. 그도 이상했나 봅니다. 혼잣말로 “바작?”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그제야 ‘아차’ 싶더군요. 짐짓 모른 척 ‘카스텔바작’으로 고쳐 불렀죠. 인터뷰는 잘 끝났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 맘대로 ‘영희’를 ‘희야’로 부른 거나 다름없는 실수였습니다. 더구나 처음 만난 60대 원로에게 말이죠. 카스텔바작씨, 지면을 빌려 결례를 사과드려요. <이도은>

◆이제 고백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금요일 새벽 4시’를 만들면서 기사에는 못 담은 취재 뒷얘기들을 쓰자고 했습니다. 마치 독자들이 직접 인터뷰하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 분위기를 전달하자는 거였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후배 기자들이 후기를 쓰면서 은근히 자신의 취재 공력을 과시하려 드는 게 아닙니까. 아니면 눈 지그시 내리깔고 일장훈시라도 할 태세이기도 했습니다. 후배들을 꼬드겼습니다. “이효리 봐라. 예쁜 척했으면 못 떴을 거다. 스스로 망가지니 스타가 되지 않더냐.” 후배들도 알아듣고 스스로 망가졌습니다. 좀 더 망가지도록 기사를 손보기도 했지요. 그래서 다리 짧은 기자, 영어 못하는 기자, 목살 접히는 기자, 아내에게 구박받는 기자, 몸이 약해 골골하는 기자들이 탄생한 겁니다. 저도 망가졌습니다. 독자들 중에는 ‘뭐 이런 악질 에디터가 있어?’ 생각하신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뭐, 다 틀린 사실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란 겁니다. 팔불출 같은 소리지만 제 눈에 정말 에이스들입니다. 다리가 좀 짧아도 독자를 위해 인터뷰할 때는 더 빨리 달려갑니다. 그들을 놔두고 저는 이제 자리를 옮깁니다. j를 아주 떠나는 건 아니고 야전사령부에서 지휘참모부로 이동하는 셈이지요. 악질 에디터가 떠난 j는 훨씬 풍부하고 알찬 지면이 될 것입니다. 지켜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훈범>

j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신문 ‘제이’ 74호
에디터 : 이훈범 취재 : 성시윤 · 김선하 · 이도은 · 이소아 기자
사진 : 박종근 차장
편집·디자인 : 이세영 · 김호준 기자 , 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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