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시골풍경에서 평화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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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이게 또 네가 보면 자존심 상한다고 할 만한 책이구나. 이번에도 또 너보다 훨씬 어린 아이들이 보는 책이지만 꼭 이야기하고 싶은 책이야. 오늘 너와 함께 보고 싶은 책은 유치원 어린아이들이 충분히 볼 수 있는 책이겠어. 이 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한 두살 정도밖에 안된 어린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는 이야기부터 하고 싶어.

글은 물론이고, 책 속의 그림의 뜻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주 갓난 아이들도 책을 좋아한다지. 그건 그 아이들이 책의 종잇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어간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래. 이해할 수 없는 자기와 무관한 세상이지만, 워낙 호기심이 많은 그만한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일이겠지.

생각해 봐, 아이야. 그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니? 제대로 걸음마도 하지 못하는, 그러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해 있는 어린 아이가 자기 힘으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 그건 그 아이들에게 매력적일 거야. 아직 말도 잘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어린 아이가 자기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고 들어간다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이겠어.

너처럼 다 큰 아이들도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일이 가끔 있지. 아이야, 강화도에서 겪은 갯벌 체험 같은 게 그런 거야. 그 날, 재미있었니? 나도 온 갯벌을 내 세상이라 나뒹굴면서 온몸이 개흙 덩어리가 돼 보고 싶구나. 아파트 담벼락에 가로막힌 도시의 꽉 막힌 세상에 살다가 앞으로는 바다가 멀리까지 확 트인 갯벌.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잖아. 어쩌면 우리는 늘 새로운 세
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 살고 있는 것이야.

가끔은 말야. 이미 지나온 세상을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많이 들지. 오늘 이야기하는 이 책은 그렇게 어린 아이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펼쳐보기에 꼭 알맞은 책이야. 훨씬 전에 스스로가 겪은 세상이지만, 어린 아이의 세상은 언제나 맑고 아름다운 세상이지. 그래서 이 책은 유치원생 정도 되는 어린 아이를 위한 책이지만, 네게도 읽어보라고 권할 수 있는 책이야. 물론 나는 무지 재미있게 읽었지.

예전에 충북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시던 윤구병 선생님이 쓰신 네 권의 책이 바로 이 책이야. 이 책은 윤구병 선생님이 글을 쓰시고, 이태수 선생님이 그림을 그리셨는데, 글과 그림이 참 잘 어울린 재미있는 책인 것 같아.

〈도토리 계절 그림책〉(보리)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의 시리즈가 처음 나온 것은 지금부터 3년 전인 97년 3월이야. 계절 그림책이다 보니, 봄·여름·가을·겨울이 나와야 하는데, 여름과 겨울 편부터 나오고 지난 달에 가을이 나오면서 4권의 책이 완성된 것이야.

그림 책 중에 4계절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는 책은 이게 처음이 아니지. 외국의 그림책 중에 〈찔레꽃 울타리〉(질 바클렘, 도서출판 마루벌)라는 책 있었지? 생각 나니? 들판을 지나 냇가 옆 덤불 숲의 들쥐 마을에 사는 머위, 눈초롱, 마타리 등의 이름을 가진 들쥐들이 사계절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재미있는 책이었지. 글도 글이지만, 그림이 정겹게 다가오는 책이었어.

〈도토리 계절 그림책〉은 들쥐나 다른 짐승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 주인공인 책이야. 여름을 주제로 한 책은 〈심심해서 그랬어〉라는 제목이었고, 겨울은 〈우리끼리 가자〉였지. 〈심심해서 그랬어〉의 표지 그림은 잊을 수가 없구나. 언덕 위로 원두막이 보이는 한적한 시골 길에 누렁이 한 마리와 너보다 훨씬 작은 여섯 일곱살 쯤 된 어린 아이가 머쓱한 표정으로 하얀 고무신을 신고 뒤를 돌아보는 표정은 너무 재미있단 말야. 그 뒤로 보이는 풍경 또한 잊을 수가 없어.

파꽃과 상추가 무성하게 자란 밭 사잇길, 그 사이. 아이는 어느 쪽으로 갈까 고민하는 것 같아. 원두막이 있는 길로 걸어올라가려다 문득 뒤를 돌아다 본 순간이 바로 그 표지의 그림이야. 아주 평화로운, 그래서 조금은 심심해지는 시골 풍경이지. 여름의 따사로운 햇살이 만져지는 듯한 그림이야.

스타크래프트와 백화점을 좋아하는 아이야. 이 네 권의 책에 나오는 시골 풍경을 혹시 너는 아니? 참 아름답구나. 이번에 새로 나온 가을 편 〈바빠요 바빠〉의 표지인 곶감 말리는 풍경은 또 얼마나 풍성해 보이니? 너는 아마 백화점의 아이스크림 코너에서 이런 풍성함을 느끼고 있겠지.

이 책은 너보다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 거다. 아이들 그림책에서 흔히 보이는 같은 리듬으로 되풀이되는 동시같은 글, 만져질 것만 같은 아름다운 그림. 게다가 도시에서는 흔히 겪을 수 없는 우리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은 어쩌면 너처럼 도시에서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그저 남의 이야기로만 보일 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아이야. 이 책을 그냥 너보다 훨씬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쓰인 그림 책이라고 집어 던지지 말고, 가만 가만 잘 들여다 보거라. 어쩌면 그 안에는 네가 컴퓨터 게임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사람 살이의 슬기로움이 담겨 있고, 도시에서는 느끼기 힘든 따뜻한 평화가 있어. 겨울 편 〈우리끼리 가자〉에는 곰과 토끼, 노루가 함께 뛰노는 장면도 있잖아. 그건 실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림 책에서는 가능하잖아.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지혜는 그저 눈에 보이는 현실만 가지고는 찾아지지 않는 모양이야. 이 책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차츰 잊혀져 가는 지난 날들을, 혹은 지금도 시골 어디에선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생각하게 되지. 그게 어쩌면 우리 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보다 폭넓게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아이야. 이 책을 쓰신 윤구병 선생님은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라는 직업을 버리고 시골에서 시골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시고 있단다. 바로 그 삶 안에서 삶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철학을 찾고 싶은 건가봐. 그래서 시골 풍경에서 평화와 지혜를 찾아내려 한 이 책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거야. 한번 꼼꼼이 보지 않으려니?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이 글에서 이야기한 책
* 도토리 계절 그림책(윤구병 쓰고 이태수 그림, 보리)
-'우리끼리 가자' '우리 순이 어디 가니' '심심해서 그랬어' '바빠요 바빠' 등
모두 4권
* 찔레꽃 울타리(질 바클렘, 도서출판 마루벌, 1994년)
-'봄 이야기' '여름 이야기' '가을 이야기' '겨울 이야기' 등 모두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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