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웨이브의 대표적 SF 작가, 로저 젤라즈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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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주된 일이면서 힘든 작업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저자와의 원고 줄다리기일 것이다. 발행 스케줄은 잡혀 있고 원고 입고일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하면 속된 말로 '똥줄 탄다'라는 말의 오의(奧義)를 싫어도 체득하게 된다. 심한 경우 전화로 사정하고 이메일로 협박해도 타들어가는 똥줄은 진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줄다리기가 번역 작가와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로저 젤라즈니의 중단편집인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은 그렇게 처절한 원고 줄다리기를 통해 얻어낸 작품이다.(슬프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역자로부터 단편 하나를 아직 받지 못했다.)

참 재미있는 일은 이런 원고 줄다리기가 단지 역자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라이팅 블록(writing block : 똥구멍이 빠지도록 애를 써도 글 한 줄 쓰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적 공황 상태) 때문에 벌어졌다는 것이다. 아니, 창작물이 아닌 번역물인데도 그런 게 있나 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역자에게도 분명히 라이팅 블록이 있다.

게다가 역자가 원저자의 작품에 미쳐(?) 있는 정도에 따라 그 증상의 심각성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거의 창작과 비슷한 고통이 수반되는 모양이다. 여기서 편집자는 작품의 질이냐, 발행일의 준수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역자 못지않은 고통을 받게 된다.

국내에서도 로저 젤라즈니는 SF, 판타지 소설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알려지고 사랑 받는 작가이다. SF 문학계에서는 최고의 영예로 치는 휴고상와 네뷸러상을 다수 수상한 젤라즈니는 그 소재의 특이함, 기가 막힌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으로 전세계에 걸쳐 열렬한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장르 문학 안에서의 그의 업적을 빗대어 혹자는 그에게 'SF계의 비틀즈'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젤라즈니의 소설에서는 아서 C. 클라크의 작품에서 느끼던 소재의 육중함에서, J.G. 발라드가 선사하는 내용의 난해함에서도, 그리고 마이클 클라이튼의 작품에서 풍겨지는 경박한 통속성에서 벗어나 고고하면서 흥미진진한 그의 환상적 세계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

젤라즈니를 젤라즈니답게 만드는 요소로는 SF 소설로서는 사치라고까지 느껴지는 그 화려하고 세련된 문체, 〈신들의 사회〉, 〈내 이름은 콘라드〉, 〈엠버〉등의 장편에서 보여주었던 신화와 SF와의 기가 막힌 조화 등이 아닐까 싶다.

SF 자체가 현실 토대의 언어로는 묘사가 안 되는 장르 문학이고 게다가 씹으면 씹을수록 말맛이 달라지는 젤라즈니의 문체, 더구나 그런 젤라즈니에게 푹 빠져 있는 역자라니, 역자의 라이팅 블록을 십분 이해할 것 같다.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은 멸망해 가는 화성의 무희(舞姬)와 지구의 젊은 시인의 사랑을 그린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영원을 맛본 한 사내의 좌절과 고투를 기록한 〈폭풍의 순간〉, 네뷸러상을 수상한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등 강렬한 신화적 상징과 화려한 스타일로 미국 SF계를 풍미한 젤라즈니의 초기 대표작 15편을 묶은 중단편집이다. 단편 하나하나마다 그의 기발한 상상력에 놀라게 되고 게다가 골라 읽는 재미가 있지 않는가!

강경문(시공사 단행본사업부 대중문학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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