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eekiy]PUMP로 성적 억압 해체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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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더위에 온 몸이 나른한 주말 오후. 장충체육관은 젊은이들의 열기로 폭발할 듯하다. 농구나 배구 같은 스포츠 경기 때문이 아니다. 노랗고 빨간 헤어 스타일에 헐렁한 힙합 차림의 복장으로 이곳을 가득 메운 이들은 바로 ‘PUMP 마니아’ 혹은 ‘디지털 춤꾼’들이다.

여기서 다소 귀찮기는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무감각하거나 생물학적 나이의 한계 때문에 ‘PUMP’가 ‘어떤 물 끌어올리는 장???줄 알고 있는 사람들(?)
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하도록 하자.

PUMP는 흔히 ‘DDR’(Dance Dance Revolution)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디지털 댄싱 게임기의 한국판 버전이다. 이미 ‘DDR 신드롬’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에서 디지털 댄싱 게임의 열풍은 매우 남다르다.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해서 한국 젊은이들이 거의 중독 증세를 보일 정도로 열중하고 있는 것은 일본식 DDR이 아니라 바로 ‘PUMP’(PUMP IT UP)
라는 토종 기계.

두 개의 디지털 댄싱 게임기가 가지고 있는 차이점은, DDR이 주로 팝송으로 구성되어 있고 십자형(전후좌우)
으로 화살표가 네 개인 반면, PUMP는 철저하게 대중가요로 구성돼 있으며 화살표가 엑스자형(전후 좌우 중앙)
으로 다섯 개라는 점이다.

최근 오락실을 가본 사람이라면 한국에서의 DDR 신드롬이 실제로는 PUMP 신드롬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PUMP는 최근 새로운 대중가요로 무장한 세 번째 버전을 출시했으며, 젊은이들은 이 새로운 댄스 가요들과 화살표 코드를 마스터(?)
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또한 부수적인 효과로 다소 철 지난 댄스 뮤직들이 이 게임기의 영향으로 다시 상종가를 치는 문화적 괴현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날의 열기는 다름 아닌 새로운 버전의 출시를 기념해 제작사가 마케팅 차원에서 준비한 ‘제2회 PUMP IT UP GRAND Festival’이라는 행사였다. 현란한 디지털 이미지(화살표)
와 사운드에 맞추어 가히 신기의 몸놀림을 보여주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마치 ‘이것이 진짜 N세대이다!’라고 주장하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수많은 동전을 꺼내 PUMP에 쏟아 붓는 이유, 그리고 이러한 문화현상이 내재하고 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춤, 젊음과 육체의 언어

PUMP의 가장 큰 구성 요소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춤’이다. 최근 디지털 게임기가 보여주는 문화적 파장이 이미 일반적인 경향이라면,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여타의 디지털 게임기와 PUMP의 명확한 차이점은 바로 직접적인 육체의 움직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즉 PUMP에 있어서 육체의 움직임이란 바로 춤이라는 형태로 구현되며, 디지털 게임기와 춤과의 만남이 PUMP가 ‘대박’을 터뜨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다.

더욱이 공부 잘 하는 아이보다 춤 잘 추는 아이가 인기 있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음악보다는 댄스뮤직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의 공동체 속에서 춤은 이제 단순한 놀이나 유희가 아니다. 이미 그들의 세계에서 춤은 하나의 언어이자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며, 나아가 문화 그 자체다.

‘PUMP 신드롬’의 내면에는 춤이라는 비이성적인 문화적 감수성이 내재돼 있다. 젊은이들은 PUMP와 춤을 통해 지금까지 인정되어 온 이성과 논리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도전을 무의식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PUMP로 상징되는 젊은이들의 춤 문화는 바로 ‘육체의 드러남’ 혹은 ‘몸의 정치학’이라는 문제 설정과 동일하다. 즉 지금까지의 사회에서는 이성과 논리가 언제나 문화 지형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유해 왔으며, 이는 실제로 움직이는 육체의 과정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왔다.

따라서 춤을 비롯한 기타의 육체문화는 그 즐거움이나 유의미성과는 무관하게 즉흥적이고 저열한 문화로 받아들여져 왔고, 성 문화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육체문화는 지금까지 도덕이라는 미명 하에 암묵적인 억압의 대상이었다.

또한 문화를 통한 주체 형성 과정 역시 주로 언어와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문제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에,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육체의 문제는 언제나 논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성과 논리 못지 않게 육체에 각인된 비언어적 감수성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이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 행위 역시 주체의 사회적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PUMP에서 드러나는 젊은 세대의 춤은 육체의 문화와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문화 지형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 형성되어 온 이성 중심주의와 그것의 권력적 억압 구조에 대한 도전이라는 문제 의식을 동반하게 된다. 즉 PUMP에 몰두하는 젊은이들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주류 사회 및 기성 세대와의 관계 속에서 육체에 작용하는 쾌락 및 권력의 문제를 문화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PUMP는 육체와 소비 문화 만남의 상징

하지만 기존의 이성 중심문화와는 다르게 ‘육체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 ‘PUMP라는 디지털 놀이문화가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PUMP를 통해 드러나는 젊은 세대들의 육체 문화는 기존의 주류 문화가 가지고 있던 억압적 권력 관계나 무차별적 상업주의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극단적이고 위력적으로 그것들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즉 PUMP는 디지털 댄싱 게임기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육체의 소비화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그리고 이는 육체문화의 상품화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80년대 이후로 급격하게 등장한 대중적 오락 문화의 팽창, 전통적 노동 윤리의 붕괴와 쾌락 문화의 증대, 그리고 성과 육체의 상품화와 같은 새로운 사회 현상들은 강도 높은 노동 과정에 속박돼 있던 육체를 점차 일상생활의 전면으로 부각시켰다.

그리고 기존까지 반(反)
정신주의, 반(反)
계몽주의의 관점에 입각해 기존의 학문적, 예술적, 사회적 체계를 거부해 온 다양한 육체 문화의 실험들이 점차 그 비판적 충격의 강도는 감소되고 소비 문화의 상업성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육체를 전면에 내세워 육체를 둘러싼 권력 구조, 성적 억압 등을 해체한다는 것과 자본주의적 상품 미학, 문화산업, 여가산업의 상업성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난립하는 성 고백서를 통한 개별적인 욕망의 상품화, 다이어트 산업을 위한 육체적 나르시시즘과 획일화, 육체의 상품 가치를 증대하기 위한 건강 보조식품의 ‘젊음=아름다움=건강’이라는 방정식만이 기존의 문화 질서에 착실하게 기여하고 있다.

따라서 PUMP 역시 디지털 놀이문화라는 기술적 기반을 바탕으로, 이러한 소비문화의 지형 속에서 육체를 획일화시키고 상품화시키는 장치로 활약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디지털로 코딩 된 댄스 뮤직(사운드)
과 화살표(이미지)
, 그리고 경제적 효율성에 입각한 발판(놀이공간)
을 통해 소비 문화에 대한 적응을 육체 깊숙이까지 강요받게 된 것이다.

PUMP는 욕구와 욕망을 자극하도록 고안된 다양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제공한다. 그리고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한 사회적 공간의 물질적 변화(생태적 놀이 공간의 축소)
와 놀이문화에 대한 비용 지불 방식을 교육받는 과정으로 기능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소비 문화의 일상화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상호작용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

물론 기계적 노동과 이성적 판단에 강제되어 온 대중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육체에 대한 배려를 시도하는 것, 감각적·성적 쾌락의 개방적 충족에 대한 요구를 규율화된 또는 상품화된 성적 욕망 장치들과 모델들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장할 가능성은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즉 육체, 쾌락, 지식의 다양성은 문화적 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문화적 행위가 쾌락이나 욕망, 그것의 중심 장소로서 육체의 현실적 조건을 배제한 과정이 아니라 이를 사회적 관계의 주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육체가 무차별적으로 상품화되는 것을 묵인하는 데 기여해서는 안 된다. [i weekly=이원재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정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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