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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피아가 애국가 저작권 요구

중앙일보

입력

연습장에서 만난 국립극단 원로배우 백성희(75)씨는 "이런 것도 자주 해야지. 그래야 연기역량도 키워지지 않겠어"라며 잘라 말한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마르고 닮도록〉(24일∼7월2일·02-2274-3507)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지난 15일 끝난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통일에 전격 합의하고 양국 공통의 국가를 제정키로 결정한다면….

그래서 스페인 마피아가 지난 35년 동안 한국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해온 '애국가' 저작권 사용료가 무효로 돌아간다면…. 스페인 마피아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1965년 현지에서 사망하자 그의 국적이 스페인이었다는 점을 들어 저작권을 주장해 왔다.

다분히 만화 같은 설정이지만 연극 〈마르고…〉은 이렇게 끝난다. 한국을 대표하는 관념적 극작가인 이강백이 처음으로 시도하는 본격 코미디다. 원작에선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는 98년까지 다루지만 연출가 이상우가 최근 정세를 고려해 웃음의 강도를 높였다.

〈마르고…〉의 발상은 이처럼 엉뚱하다. 스토리 자체가 상식을 벗어난다. 안익태의 유족을 가장한 스페인 마피아가 '애국가' 사용료를 받으려고 한국에 원정대를 파견한다. 이들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 전·현직 대통령을 모두 만나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간다.

연극의 속셈은 우리 현대사를 비꼬는 데 있다. 군사정권 시절부터 최근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한국의 정치·사회를 풍자한다.

마피아 원정대는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최루탄 가스에 울고,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대원들을 잃기도 한다. 시종일관 철저한 희극이지만 그 속엔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이 숨어 있다. 실제 역사에 가짜를 섞어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하는 것이다.

"신난(辛難)한 우리 삶을 웃음과 즐거움으로 바꿔놓았다."(이강백) "역사를 꼬집은 가짜 다큐멘터리극이다."(이상우)

희극답게 무대는 매우 빠르게 진행한다. 각종 번잡한 장치를 걷어내고 배우들이 분주하게 들어오고 빠져나간다. 등장 인물도 만화처럼 과장·왜곡되게 표현한다. 리얼리즘 정통극을 주로 공연한 국립극단으로선 엄청난 변신이요, 모험이다. 다만 1천5백여석의 대극장을 배우들 몸짓 하나로 장악할 수 있을지 기다려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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