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떡이 된 삼겹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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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호 10면

지난해 여름의 일이다. 나는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았다. 초대해 준 사람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윤성호 감독이었다. 개봉 전 마지막 시사인데, 종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목요일 오후 8시에 진행되니 시간과 동선이 되면 와서 보라는 초대였다.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나는 너무 기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호성을 지를 뻔했지만 사무실이었고 동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어 겨우 참았다. 나는 무조건 시간과 동선을 목요일 오후 8시 종로로 맞췄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나는 윤 감독의 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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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회가 있던 목요일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연우와 나는 낙원상가에서 오후 7시40분에 만났다. 시간이 남아 로비에서 서성대다 출입구 쪽에 수줍게 붙어 있는 A4용지를 발견한다. ‘일반시사회 8시30분’. 시사회가 시작되려면 앞으로 50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예상치 못한 잉여시간이 생기면 갑자기 지루해진다. 만나면 늘 화제가 끊이지 않던 연우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른다. 별수 없이 우리는 비 구경만 한다. 길고 지루한 장마 비 구경을.

오후 8시25분쯤 입장하려는데 영화 홍보팀 부스에 윤 감독이 보인다. 나는 얼른 달려가 인사를 드린다. 윤 감독이 놀란다. “이제 오신 거예요? 시사회는 8시부터였는데.” 그날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후 8시와 8시30분, 두 차례의 시사회가 있었다. 우리가 초대받은 시사회는 8시 시사회였는데 A4용지의 안내문구를 보고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의심도 하지 않고, 확인도 하지 않고.

지난주 일요일의 일이다. 우리 부부는 얼마 전에 자대 배치받은 둘째 면회를 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자동차를 가져간 것은 부대가 화성이라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고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처음 가는 길이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트렁크에 음식을 가득 실을 수 있어 좋았다. 삼겹살과 상추와 풋고추와 오이와 마늘과 밥과 된장찌개와 귤과 바나나와 배, 그리고 커피와 도넛과 휴대용 가스버너와 수저와 칼과 물티슈와 휴지 등등의 짐들이 트렁크를 가득 채웠다.

둘째는 군복이 영 안 어울린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어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렸는데 군복은 꼭 남의 옷을 입혀 놓은 것처럼 어색하다. 부대에 도착해 둘째를 보자마자 아내는 상부터 차린다. 면회는 식회다. 아들 얼굴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음식 먹이러 가는 게 면회다. 커피와 도넛과 귤과 바나나와 배를 먹인 다음 아내는 삼겹살을 먹이자고 한다. 나는 아직 점심때도 아니니 아들 얼굴도 좀 보고 이야기도 하자고 한다. 아버지로서 뭔가 아들에게 계몽적인 말을 해 주고 싶다. 군생활 경험을 꺼내며 군에서는 연대책임을 지기 때문에 적어도 부대원들에게 폐는 끼치지 않는 군인이 돼야 한다고, 미리미리 준비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한다. 아내는 방위 다녀온 사람이 무슨 군대 이야기냐며 고기나 구워 점심을 먹이자고 한다.

나는 준비해 온 휴대용 가스버너 케이스를 연다. 그런데 전동 드릴이 들어 있다. 케이스 색깔이나 모양이 비슷해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의심도 하지 않고, 확인도 하지 않고. 아내와 둘째가 나를 노려본다. 삼겹살과 상추와 전동 드릴도.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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