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장인정신의 승리 <영웅전설>시리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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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건담시리즈는 최근작 턴A건담이 방영되면서 또 한번의 신드롬을 일으켰다. 70년대 초기작 이래로 이른바 건담 매니아들은 이 건담의 세계관 속에서 열광하며 그 세대를 이어오고 있다.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영화, 소설, 만화 등에서도 잘 짜여진 작품과 작품 외적인 기획력으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이룬 실례들이 많다. 이런 작품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속편과 외전들을 양산하며 시리즈의 명맥을 이어간다.

일본 팔콤의 <영웅전설>시리즈는 최근작인 5편을 마지막으로 일명 '가가브 3부작'이라 불리는 부제의 3부작을 완성시켰다. 자사의 간판 작품인 <이스>시리즈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던 팔콤은 <드래곤 슬레이어 - 소서리언>시리즈로 일본 PC RPG계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드래곤 슬레이어>시리즈의 5편의 부제가 <영웅전설>로 팔콤은 이 제목으로 1990년 새로운 시리즈를 발매하게 된다.

이 <영웅전설>시리즈는 일명 레벨 노가다라 불리는 지루한 던전에서의 전투로 인한 레벨 올리기를 지양하고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레벨을 올리는 과정이 롤플레잉 게임의 재미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스토리 위주의 진행방식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영웅전설>시리즈는 3편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는데 완벽한 시나리오와 밸런스로 국내 롤플레잉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3편부터는 '가가브 3부작'이라는 부제로 4,5편에서 그 이전의 세계를 다뤄 흡사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1'에서 중심인물인 다스베이더의 과거를 따라가는 식으로 시나리오의 중심에 있는 하얀 마녀 게르드의 순례기를 밟아간다.

이러한 진행방식은 소설에서 화자가 자신의 과거를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방식처럼 플레이어가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거기에 팔콤 특유의 이벤트 연계에 대한 스토리 전개는 NPC와의 대화나 전투에 하나의 의미를 담게 하여 게임에 대해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최근작인 <영웅전설5 - 바다의 함가>에서는 시리즈 사상 가장 방대한 시나리오로 종결의 의미를 더했는데 전편의 등장인물이 모두 등장하기도 해 영웅전설 팬들에게 큰 서비스가 되기도 했다.

<영웅전설>시리즈는 겉모양만 봐서는 요즘에 전혀 인기를 끌만한 게임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단은 턴 방식의 전투나 SD 캐릭터, 그리고 오프닝이나 엔딩에서도 2D 일색인 (5편에서는 어느 정도 사용했으나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겉모습은 어쩌면 구태의연하게 시리즈의 인기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턴 방식의 자동전투에는 시리즈별로 약간씩은 다르지만 플레이어가 개입하여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독특한 형식이 사용되고 있다. 오히려 게임의 내용에는 신경 쓰지 않고 현재 주류인 실시간 전투를 어설프게 도입한 게임들이 많은 것이 요즘이다. 액션 RPG의 대명사인 <이스>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만들었을 만큼 팔콤이 <영웅전설>의 전투 방식에 나름대로 힘을 쏟은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귀여운 디자인의 캐릭터와 2D를 고집한 그래픽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나 친근한 세계관을 나타내기엔 적절하게 느껴진다.

10년간 계속되는 이 게임시리즈의 인기의 비결은 무엇보다 시나리오에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여행과 함께 펼쳐지는 장대한 시나리오는 게임의 외양 때문에 취해지는 아동용이라는 비난을 과감히 벗어버리게 한다. 가가브의 3부작의 철저한 연계는 게임을 여러 번 플레이해도 전혀 허점을 발견할 수 없어 팔콤의 장인정신을 새삼 느끼게 한다.

팔콤은 <영웅전설> 3부작을 마무리 짓고 올해 윈도우 판으로 컨버전한 <신 영웅전설4>을 출시할 예정이다. 이제 <영웅전설>시리즈는 성공한 롤플레잉 시리즈의 이름을 남기며 일본식 롤플레잉의 계보를 따르는 게임들의 표준이 되어 가고 있다. 단발성의 흥행을 위한 기획을 일삼는 우리 나라 게임계에서 주목해야 할 점들을 이 게임은 보여주고 있다. 게임은 하나의 상품이기도 하지만 제작자의 정성이 담긴 작품이기도 하다. 철저한 기획과 좋은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 어렵지만 그럴수록 그 생명은 더욱 오래가게 된다. 성공한 게임의 장르를 모방하여 내용이 없는 껍데기뿐만의 게임이나 지루한 시리즈의 반복으로 가는 경우를 가끔 본다.

우리도 <영웅전설>시리즈처럼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이루는 게임이 필요할때이다. 게임이 단순한 키보드 놀음을 벗어나 문화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제작사의 장인정신이 필요한 때가 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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