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는 C양이 최적입니다" 기계가 욕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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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청정한 어느 가을날, 나는 파워 트위플 A씨를 포함한 일단의 젊은이들과 산행을 했다. 등산로 초입에서 A씨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내보이며 일행에게 제안했다. “자, 각자 1m 걸을 때마다 1원씩 적립하는 겁니다. 여유가 되시는 분은 10원을 적립해도 좋습니다.” 그의 스마트폰은 30분에 한번씩 일행이 얼마나 걸었으며 평균 속도가 얼마인지 알려주었다. 인공위성의 감시 아래 걷는 것 같아 어색한 감도 없지 않았으나, 새로운 놀이를 하는 것 같아 다들 신나게 걸었다. 그날 우리 일행은 총 11㎞를 걷고 22만원을 모았다. 많지 않은 돈이지만 장애인 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스마트폰의 기부 관련 앱을 통해 기부 대상을 찾았다. 2011년 9월이었다.

이런 얘기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스마트 제국’의 정예 요원이 아니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고성능 카메라와 동영상을 활용하고, 인터넷 검색과 e-메일 체크를 하며 모바일 접속의 혜택을 누린다. 그러나 A씨와 같이 창의적으로 자연과 기술을 결합하거나 그것을 사회적 책임으로 연결시키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다.
10년 후 세상도 그럴까. “접속하세요.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속도가 더 빨라졌어요. 신나는 디지털 세상!” 사방에서 아우성이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도 제각기 휴대전화를 통해 다른 세상과 접속한다. 손 안의 스크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스크린 중독 현상이다. 젊은 세대는 대면(對面) 만남보다 스크린 만남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디지털 기술 진화에 맞춰 자아 개발과 함께 공동체의 발전을 꾀한다.

10년 후 세상은 어떨까. 젊은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누군가와(혹은 무엇과) 연결돼 있어야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휴대전화를 분실하면 공황장애와 비슷한 증세를 보인다. 접속과 연결이 끊기는 순간 내가 사라지는 느낌을 갖는다. 그들은 쉬지 않고 연결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올라오는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에 다 반응한다. 잠든 사이에도 연결은 끊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무척 바빠진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SNS의 확산 이후 일터에서 능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잇따르는 이유다.

그렇다면 미래의 인류는 과잉 접속의 늪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얕은 꿈과 천박한 욕구만을 공유하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할 것인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뤼즈는 욕망을 기계로 봤다. 욕망에는 인격이 없다. 시작도 끝도, 주체도 객체도 없이 항상 접속과 연결을 갈망하는, 무의식적인 기계다. 들뤼즈가 말하는 기계는 기계들의 종합인 ‘장치’에 가깝다. 상황에 따라 분절·조합·재배열이 가능한 역동적인 기계다.

기술-인간 복합체, 개인·집단 욕망 동일시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들뤼즈의 ‘욕망-기계’는 디지털 융·복합시대의 네트워크화된 욕망과 잘 들어맞는다. 인간, 프로그램, 사물, 기술, 제도, 문화 등이 뒤엉킨 욕망-기계는, 점멸하는 비트(bit)의 흐름 속에서 웅웅거리며 전 세계적으로 연결된 서버들의 네트워크로 표상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광대한 네트워크에서 개인의 주체성은 영영 사라지는 것인가.

“ID XXXX님, 이번 주말 데이트 상대로는 네트워크 인기지수와 당신의 선호함수를 고려해 C양이 최적입니다.”
10년 후 세상에선 기술-인간의 복합체(hybrid)가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구조화하고 실현할 수 있다. 네트워크 욕망은 접속·연결의 욕망이다. 클라우드 컴퓨팅 시대에 욕망은 의식을 넘어 ‘머리 위 구름(인간-기술 복합체)’에서 집단적으로 형성된다. 첨단기술이 발달할수록 무엇이 무엇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욕망의 실체는 점점 불투명해진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혼돈에 빠진 개인은, 끊임 없이 잡종과 변종을 생산해 내는 네트워크 욕망의 정력과 속도에 감탄하며 즐거워한다. 그리고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속도와 양을 얻는 대신 깊이와 질을 잃어간다.

그러나 어떤 강력한 수퍼컴퓨터도 결국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연산기기일 뿐이다. 논리가 깨지면 컴퓨터는 죽는다. 반면 인간에게는 논리를 초월하는 힘이 있다. 그것이 욕망일지 모른다. 인간 존재의 심연에서 마그마처럼 끓고 있는 삶의 에너지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돈? 권력? 명예? 성애? 이것들이 1차적인 동인은 아닐 것이다. 인간과 신이 공존하는 의식세계를 지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에로스(Eros)를 지목했다. 아름다움을 향한 끝없는 상승 욕구다. 그러다 중세에는 기독교 교리가, 근대에는 합리성과 이성이 인간의 욕망 기제를 억누르는 역할을 했다.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는 생의 능동적 의지를 뜻하는 ‘코나투스(Conatus)’라는 화두를 던졌다. 육체와 정신을 포괄하며, 현상 유지가 아닌 더 큰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는 욕망이 인간을 움직인다는 논리다. ‘초인’을 외친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를 욕망의 실체로 보았다. 19세기 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리비도(Libido), 즉 성 충동을 욕망의 실체로 규정했다.

하지만 욕망을 특정 대상에 고착시키다간 욕망이 인간을 집어삼킨다. ‘저 사람과 결혼 한다면, ‘내 아이가 어느 대학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저 핸드백만 손에 넣으면’….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낳고 다른 것(사람)에 눈을 돌리게 한다. 욕망은 상대적이다. 얼마 전 디자인과 라이프 스타일을 선도하는 도시 암스테르담에 갔을 때 일이다. 평소 요란한 옷차림을 선호하지 않지만 그곳에서만큼은 손에 든 루이뷔통 가방을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었다. 수수한 옷차림을 한 시민들 사이에서 명품 백이 어찌나 촌스럽게 보였던지….

10년 후 미래의 욕망은 치우침에서 벗어나 균형을 꾀할지 모른다. 예컨대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의 후유증이 심각해질수록 그린(Green)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증대할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선 게임산업 같은 온라인 콘텐트 산업과 함께 레저 관련 산업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전국의 국립공원 방문자 수가 지난 5년 새 2배 증가했고, 아웃도어 용품의 시장은 3배나 커졌다. 온라인 문화 및 여가활동 못지않게 오프라인 활동도 증가한다는 증거다. 아직은 A씨와 같이 등산부터 기부까지 온·오프라인을 창의적으로 연결하는 유저들은 드물지만 향후 야외에서 모바일 게임을 하거나, 위치기반 서비스를 활용해 산책하며 드라마를 감상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남대문이나 경복궁과 같은 문화재를 방문하면 모바일 가이드가 역사를 설명해 줄 날이 그리 머지 않았다.

욕망 충돌 조절할 ‘디지털 휴머니즘’
욕망은 또한 물질과 정신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는 형태로 드러날 것이다. 요가나 명상 또는 악기를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CEO를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가 인기를 끈다. 물질적 소비가 행복의 첩경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현상이다. 소비생활을 건강하고 친환경적으로 꾸려가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양과 속도 대신 질과 깊이를 추구하는 슬로 라이프가 확산된다. 하지만 녹색 미래로의 전환에는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비용이 발생한다. 개개인은 삶의 패턴을 바꾸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미래세대까지 포함해 다 함께 좋은 환경을 누리자는 ‘공공선’을 향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자본주의 4.0은 시장의 역할을 존중하면서 낙오한 이들을 북돋우고 이끌어 가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미시적으로 볼 때 개인의 욕망은 예측 불가능하다. 지금도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창의적 통합보다는 게임의 중독성에 더 쏠린다. 물질적인 유혹에 쉽게 무너지며 환경과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이기적 욕구를 채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더구나 요즘 젊은 세대는 항상 디지털 군중과 몰려다니며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책과는 담을 쌓은 소위 영상세대에게 내적 성찰이니 사유니 하는 단어들은 멀고 먼 아프리카보다 더 낯설다. 욕망과 주체의 격리다. 오죽하면 구글의 회장이자 최고경영자 에릭 슈밋이 2009년 펜실베이니아대의 졸업 축사에서 “컴퓨터를 꺼라. 휴대전화도 꺼라. 그러면 주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까. ‘나’라는 존재의 내부부터 들여다 볼 것을 권유한다.

니체와 들뤼즈의 후손인 우리는 오늘도 ‘욕망 기계’를 만드는 데 골몰하고 있다. 인간이 환경을 다스리고자 하는 욕망에서 고안된 기술과 주술은 원래 그 뿌리가 같다. 오늘날의 기술정령(Techno Spirit)들은 이전의 절대 신처럼 우리 위에 군림하지 않고, 아무곳에나 편재하며, 접속만 하면 우리에게 봉사한다. 스티브 잡스로 대표되는 테크노 샤먼들의 활약으로 미래의 정령들은 우리의 삶을 더 깊이 파고들 것이다.

A씨의 최근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A씨는 전국 곳곳에 마을문고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트위터로 헌책들을 기증할 사람과, 그 책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 운반할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욕망과 욕망이 부딪치지만 타인의 욕망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세상. 10년 후 세상이 ‘디지털 휴머니즘’으로 진화하길 꿈 꾸는 건 너무 사치스러운 것일까.



노소영 미국 윌리엄앤메리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스탠퍼드 대학 교육학과 석사(90년). 아트센터 나비를 11년째 운영하며 디지털 아트라는 새 영역을 개척해왔다. 전시·공연뿐만 아니라 작품 제작과 교육에도 힘을 쏟는다. 경제·교육·커뮤니케이션 분야를 두루 섭렵했다.

노소영 관장 아트센터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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