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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댁 가는 길이 그립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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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호 31면

얼마 전 저희 가족은 이사를 했습니다. 바로 옆 동네이지만 18년 만에 한 이사라 마냥 새롭기만 해야 할 텐데 제법이나 친근한 느낌입니다. 이곳이 몇 년 전까지는 외가댁이 위치했던 작은 마을의 일부를 허물고 새로 만든 아파트 단지라서일까요. 그러니까 제가 어렸을 적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으로 돌아온 셈이네요.

제가 나고 자란 강원도 원주는 사방이 산입니다. 도시라고 하지만 번화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아직도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마을들이 많이 있는데 이곳 역시 그랬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분명 잘 포장된 도로들뿐인데 어느 순간 차 머리를 딱 한 번만 꺾어 꼬마 아이 열 발짝 정도의 작은 개울을 하나만 건너면 그때부터 온통 다른 세상이 시작되니까요.

이 길은 그야말로 ‘꼬부랑길’입니다. 중형차 한 대는 미끈하게 지날 정도의 길이지만 계속 오르막이고, 할머니 댁까지는 ‘○○수퍼’ 간판을 단 구멍가게들을 몇 채나 지나야 합니다. 키가 큰 사람은 허리도 채 제대로 못 펼 것처럼 작아 보이는 가게들이지만 그 앞 평상에는 늘 세발자전거를 끄는 손주들을 구경하는 어르신들이 부채질을 하고 계십니다.

이 구부러진 길의 끝에서 오르막이 갑자기 심해지는데, 이를 악물고 여기만 지나면 오른쪽에 꽤 큰 한옥집이 나타납니다. 무사히 올라 온 기념으로 조금 쉬고 싶지만 이 집에는 아주 무서운 개가 있어 되도록 빨리 지나칩니다. 왼쪽은 큰 논입니다. 어린 제가 이 논을 싫어했던 건 밭에 비해 색도 예쁘지 않고 항상 축축하게 젖어 있어서 그랬던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해질 녘만 되면 개구리들이 사정없이 울어대서였습니다. 마치 중세 시대의 성가곡처럼 정확한 음률도 가사도 없이 계속 반복되기만 하는 이 합창은 이른 아침에 들으면 경쾌할 때도 있지만 어두컴컴해지면 옆집 개보다도 훨씬 무섭습니다.

대신 이 길은 평탄하기 때문에 서둘러 지나면 됩니다. 그러면 아주 큰 밭이 나오는데, 이 밭은 남의 밭이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새 초록색의 늘씬한 줄기가 한여름에는 저보다도 훨씬 크게 자라는 옥수수 밭입니다. 할머니는 늘 그걸 한아름씩 따다가 집 안에서 제일 큰 솥에다가 한 번에 다 쪄놓으시니 우리가 언제라도 말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습니다. 배가 부르도록 먹고 나면 어떨 땐 밭 앞에서 ‘목마 아저씨’가 우리를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작은 플라스틱 인형들에 스프링을 단 것뿐이지만 그중에서도 꼭 제일 예쁜 핑크색 리본을 단 백마 모형이 있습니다. 남자 아이들보다 여자 아이들이 앞다퉈 타려던 것이죠.

다시 할머니 집으로 향하는 길은 이제 매우 짧습니다. 친구 한 명하고만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좁은 길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올라오면 군청색의 할머니 집 대문입니다. 겨울에 이 오르막에 눈이 내리면 종이상자를 펴서 타고 놀 수도 있긴 한데, 여기는 썰매를 타기엔 구간도 짧고 경사도 좀 심한 편이라 별로입니다. 오히려 딱 좋은 곳은 뒷동산입니다. 여기에 덮인 잔디는 봄·여름엔 새파랗게, 가을에는 노랗게, 겨울에는 새하얗게 되는 것도 다 볼 수 있습니다.

할머니 댁은 작은 한옥이었는데 집 어귀에는 무, 상추, 깻잎, 고추 등을 키우고 집 안에서는 돼지를 쳤습니다. (새끼 돼지들은 정말이지 태어나자마자 알아서 엄마 젖을 빨길래 저는 아, 이래서 많이 먹는 사람을 돼지라고 하는구나, 생각했었습니다.) 수돗가에 길게 늘어져 있는 독들은 주로 장을 넣는 독이고 겨울에 김장을 담근 독들은 보통 땅에다 파묻습니다. 그보다 이 마당에는 제가 제일 좋아하던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할아버지의 오토바이였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밖에 나가실 때마다 눈치를 보다가 가끔 한 번씩 할아버지 허리를 꼭 붙잡은 채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시내를 나갔다 왔습니다. 그게 너무 재미있어 그냥 세워 놓은 오토바이를 타고 혼자서 앞뒤로 움직이고 운전하는 놀이도 합니다. 크면 꼭 오토바이를 타는 법을 배워야지, 매번 다짐했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저는 오토바이나 차보다도 비행기를 더 많이 타게 되었고 할머니의 재봉틀 위에서 피아노 연주회 놀이를 하던 저는 진짜 연주회를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댁으로 가는 길은 중간에 뚝 끊겨 높은 아파트로 가는 길이 되었네요. 야산을 무진장 좋아하던 저에게는 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파트 꼭대기 층도 좋지만 할머니 댁이 그대로 있었더라면 진짜로 더 좋았을 걸요.



손열음 1986년 원주 출생. 뉴욕필과 협연하는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 중이다. 올해 열린 제14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2위를 했다. 음악듣기와 역사책 읽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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