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손병수의 희망이야기

글이란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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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손병수
논설위원

글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던가요.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노트북 원고지가 그저 망망대해(茫茫大海)입니다. 무엇으로 저 바다를 메워야 할지 막막합니다. 한나절에 원고지 100장을 써낸 시절도 있었는데. 푸르뎅뎅 저를 노려보고 있는 노트북 화면이 왜 그리 생경해 보이는지요.

 글이 이리도 두려운 것이던가요. 실마리는 어떻게 풀 것인가, 매듭은 또 어떻게 지어야 할까 갈피가 잡히지 않습니다. 문득 지난겨울 뉴욕의 산행길에서 만났던 공포가 떠오릅니다. 집을 떠날 때만 해도 햇빛이 보이는 날씨였습니다. 아주 가벼운 차림으로 두 시간쯤 걸었을까. 갑자기 눈보라가 산을 덮었습니다. 아이젠을 준비하지 않았던 터.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산속에서 처음 조난(遭難)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날처럼 글자들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 조난당하는 것은 아닐까.

 4년여 만에 돌아와서 다시 읽는 고국의 글들은 휘황합니다. 정교하면서도 거침없습니다. 훨씬 풍부하고, 깊어졌습니다. 어쩜 그렇게 글이 많은지, 망망대해라도 덮을 기세입니다. 요즘 가장 잘나가는 작가인 공지영은 최근작에서 “…그때 문장들이, 장대비처럼 내게 내렸다”고 썼더군요. 그렇게 글벼락을 맞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분에겐 글이 얼마나 쉬운 상대일까 하는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반면 거칠게 상처받은 시대의 단면들도 많이 보입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절망하다 못해 저주하는 글들 역시 흘러넘치더군요. 어느 신문에 실린 도종환 시인의 글입니다. “희망은 없다. 이 더러운 땅 어디에 희망이 있는가. …차별은 깊어지고, 격차는 갈수록 더 벌어지며, 내일은 오늘보다 살기가 더욱 힘들 것이다. …앞으로도 희망은 없다.” 필자의 절박함을 이해하지만, 동시에 글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 시인의 글에서 서정과 희망을 읽어 왔던 터라 더욱 가슴 아팠고요.

 글은 무릇 사람의 말과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 합니다. 그 그릇이 언제건 고단한 오늘을 어루만져주고,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희망을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대가 어렵고 삶이 거칠다고 그릇을 던져 버리진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모처럼 돌아온 내 나라가 정말 절망만 가득한 나라인가요.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시절도 이겨내고 살아남지 않았던가요. 혹시 글이 위기를, 분노를, 절망을 훨씬 많이 담아낸 것은 아니던가요.

 조난의 공포와 마주쳤던 지난겨울의 산행에서 저를 구한 것은 가까스로 찾아낸 셸터(대피소)였습니다. 거기서 불을 피워 끓여 마셨던 녹차를 잊지 못합니다. 그런 셸터, 뜨거운 차 한 잔 같은 글을 만나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원고지와 마주한 제게 묻습니다. “글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손병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