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 8년 놀았다, 지금도 논다 … 놀면서 보고 겪는 게 창의성 원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박서원 대표가 지난달 초 중앙일보 산업부 기자들의 학습모임인 중앙비즈니스(JB)포럼에서 ‘창의성’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박서원 대표

창의와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세상을 떠났다. “그만큼 창의적인 인재를 다시 볼 수 있을까”라는 탄식이 전 세계에서 쏟아졌다. 창의성이 무엇이기에 한 사람의 죽음에 전 세계가 슬픔에 빠질까. 포스터 한 장으로 뉴욕 페스티벌·클리오·칸 국제광고제 같은 세계 5대 광고제를 석권한 최초의 한국인. 재기 넘치는 광고회사 빅앤트인터내셔널의 박서원(32) 대표다. ㈜두산 박용만 회장의 아들로 뒤늦게 밝혀졌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인생의 쓴맛, 단맛 다 겪고 ‘이것이 크리에이티브다’란 점을 확실하게 보여줬으니까. 창의력이 곧 실력인 광고계에서, 그것도 유명한 국제대회를 모두 휩쓴 그에게 창의성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지난달 초 열린 중앙일보 산업부 기자들의 학습 모임 중앙비즈니스(JB)포럼에서다.

-무엇이 창의성인가.

 “우리 회사 초기 명함은 두 개를 모아야 한 장이 됐다. 고객을 만날 때 기획자와 제작자 두 명이 간다. 한 장엔 개미 머리만, 또 한 장엔 개미 꼬리만 그려 넣었다. 그리고 인사할 때 두 장을 붙여서 개미 한 마리를 만들어 줬다. 열이면 열 붙였다 뗐다 하면서 재밌어 한다. 명함이 뭔가. 우리를 알리는 거다. 두 번, 세 번 보면 좋다. 그러자면 얘깃거리가 필요하다. 창의성 하면 기발한 걸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마음은 아주 작은 것에 움직인다.”

 -창의성을 키우는 방법은.

 “광고는 보는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작업이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만들려면 자기가 즐거워야 한다. 즐거우려면 놀아야 한다.”

기생충 광고

개미 명함

 -국제광고제를 휩쓴 광고가 놀면서 나왔다는 건가.

 “20대 시절 8년을 놀았다. 1998년 단국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3학기 다녔는데 학교에 세 번 갔다. 공부도 학교도 재미 없었다. 여행 다니면서 놀았다. 유학을 가선 전공을 여섯 번 바꿨다.”

 그의 학창 시절, 요즘 우리 부모들 잣대로 보면 영 ‘개판’이다. 그의 단국대 시절, 학교에 간 횟수가 단 세 번이란다. 이듬해 무려 3회 누적 학사경고를 받았다. 미국 미시간대 비즈니스 스쿨에 다닐 때도 그랬다.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받았다. 한 번은 늘 함께 농구를 하던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전화해 보니 그 친구는 “학교 프로젝트가 너무 많아 운동장에 나가질 못했다”고 답했다. 그래서 그 친구 집에 가봤더니 친구는 종이로 우주선 만드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박 대표는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싫으면 싫다고 하지, 이렇게 놀고 있으면서 왜 운동하러 오지 않았느냐”고.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노는 게 바로 학교 프로젝트거든”이라고 대답했다. 박 대표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이게 공부구나. 나도 재미있는 걸 찾아보자.” 그러고는 산업디자인과로 과를 옮겼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미술 분야를 해보지 않았지만 적성에 딱 맞았다. 재미있으니 성적도 좋았다. 첫 학기에 올A를 기록했다. 잠도 안 잤다. 그는 “적성을 찾으니 정말 공부가 재미있어 하루에 딱 두 시간만 잤다”고 술회했다.

 -8년의 방황이 성공의 밑거름이 됐단 얘긴가.

 “그 시간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놀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재밌는지 아는 게 아니겠나.”

 -창의성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인 팁을 달라.

 “질문 속에 답이 있다. 질문을 잘 해야 한다. 또 한 가지, 끝까지 가야 한다. 놀 때도, 일할 때도 끝까지 가야 한다. 나는 이런 표현을 좋아한다. Let the idea dictate(생각이 지배해야 한다)와 Go all the way(끝까지 간다)다.”

세계 5대 광고제를 석권한 반전 포스터.

 -총부리가 총을 든 군인 머리로 향하는 반전포스터로 세계 5대 광고제를 석권했다.

 “한국인 중 알카에다 본부로부터 초청 받은 건 나뿐일 거다. e-메일 제목이 ‘용감한 형제여’였다. 독재정권이 들어선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반군은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게 도와달라’는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1만 통이 넘는 메일을 받았다. 반면 상이용사들로부터는 ‘죽여버리겠다. 뒤통수를 조심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사연이 많은 작품이다.”

 -기억에 남는 작품은.

 “헤어 스타일러 광고다. 타깃이 여성이니 여배우를 모델로 써야 하는데 제조사가 중소업체였다. 그래서 ‘기생충 광고’를 했다. 책 볼 때 포스트잇 같은 걸로 표시해놓지 않나. 여배우가 나오는 지하철·잡지광고 옆에 포스트잇 붙이듯 작은 광고를 붙였다. TV광고 뒤에도 3초짜리 광고를 붙였다. 타 광고에 기생해 여배우를 쓴 효과를 봤다.”

 -창의적인 사람을 뽑는 게 중요할 것 같다.

 “포트폴리오·경력·학벌 아무것도 안 본다. 느낌으로 뽑는다. 말할 때 동작·목소리·태도 같은 걸 주로 본다.”

 -왜 그렇게 하나.

 “광고회사에서 창의성은 실력이다. 실력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할까. 열정이 있으면 실력은 생긴다. 열정만 있으면 될까. 열정을 지켜나갈 근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근성이 있으려면 인성이 좋아야 한다. 그래야 어려움이 닥쳤을 때 피하려 들지 않는다. 인성은 스펙으론 알 수가 없다. 대신 3~6개월 실습기간을 거치게 한다. 실습이 끝나면 전 직원이 동의해야 채용한다.”

  정선언 기자

“내 힘으로 해도 재벌이라 욕 먹어

그룹 경영 참여? 가능성 0.001%”

‘트위터 회장’ ㈜두산 박용만(56) 회장의 아들인 박서원 대표는 뉴욕 페스티벌에서 한국인 최초로 상을 받은 2009년엔 아버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젊은 친구가 대단하다”는 댓글이 기사에 달렸다. 2010년 같은 광고제에서 또 상을 받았다. 이번엔 아버지를 밝혔다. “자수성가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배신당했다”는 숙덕거림이 일었다. 그는 “내 힘으로 해내도 재벌이라서 욕을 먹더라”며 “세 번 연속 수상하고 싶었다. 그러면 사람들도 ‘실력은 있구나’ 인정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또 “알게 모르게 아버지 영향을 받겠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올해도 뉴욕 페스티벌에서 상을 받았다.

 사실 그는 10대 시절부터 다른 사촌 형제들과는 달랐다. 귀도 뚫고 문신도 했다. 주위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다’가 아니라 ‘독특하다’가 됐다. 박 대표가 “어떤 성과를 이뤄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자신을 재벌로 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그는 “정작 와닿지 않는다”고 말한다. 돈이 아니라 주식이 많기 때문이란다. 물려받은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의무일 뿐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룹 경영에 참여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0.001%”라고 잘라 말했다.

◆중앙비즈니스(JB)포럼=중앙일보 산업부 기자들의 학습 모임. 글로벌 경영 환경의 급변 속에 각계 전문가들의 특강과 토론을 통해 한국 기업들의 성공전략을 찾 자는 취지에서 발족했다. 1회 모임에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함께 청년들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했다. 2회에선 개그맨 박준형 갈갈이패밀리엔터테인먼트 사장을 통해 ‘즐거운 경영’을 논의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