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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我記宅處’]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동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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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면

백사마을의 보존 개발 이후의 예상 그래픽. [서울시]

철길과 차로 등 육로교통의 요충지에 있어야 대도시의 기능을 수행하는 오늘날과는 달리 옛날의 주요 도시는 죄다 해상교통이 편리한 곳에 있었다. 증기기관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도시들의 운명을 바꾼 게 불과 200여 년 전의 일이었으니 사실 도시를 제 구실을 하게 하는 역사로는 물길이 훨씬 길다. 그래서 바다나 강에 접해야 했던 도시가 항구 기능이 마비되면 바로 폐허가 되기 마련이었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그리스 최초의 계획도시 밀레투스가 그렇게 멸망했고, 에페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도시는 원래 지중해변을 끼고 기념비적 위엄의 도시 풍경을 과시했지만 바닷가에 밀려 쌓이는 흙을 막을 수 없어 도시 기능이 끝나고 만 것이다.

 지중해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세계의 중심부였으며 가장 중요한 교통광장이었다. 지중해를 그린 고지도에 물밑의 지형이 표시된 것을 보면 그들에게 지중해는 그냥 망망한 바다가 아니라 물속의 땅이었다. 그 당시를 오늘날의 아프리카·유럽 같은 대륙의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사하라사막 위쪽 북아프리카에서 알프스산맥 아래까지가 세계의 한계였고 그 밖은 야만이었다. 그러니 지중해 한가운데 돌출한 그리스와 이탈리아가 해상교통의 패권을 잡아 그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지중해에 키클라데스 제도라 불리는 군도가 있다. 그리스반도와 크레타 사이 에게해에 떠 있는 이 220개의 섬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산맥의 꼭짓점들이 바다 위로 돌출해 만든 결과지만, 산토리니섬은 밀로스와 함께 그 자체로 화산섬이다. 전체 면적이 2000만 평에 이르는 산토리니는 특이하게 내부에 또한 2000만 평 크기의 석호를 가지고 있다. 이 석호는 수심이 무려 400m고 사방이 300m 높이의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지중해를 지나는 선박이 폭풍을 만날 때 대피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이 된다. 이는 해적의 은신처로도 최적이었으니 여기에 자연스레 마을이 발달했다. 나는 이곳을 지난 1990년대 초에 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 구해 본 관광책자는 산토리니를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동네’로 적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아름다울까.

 선원들의 임시 거처로 형성되기 시작한 산토리니의 마을은 절벽 위의 비탈면에 모여 군락을 이루고 있다. 집의 모양은 죄다 고만고만한 사각형이며 특별한 건물이 없다. 있다고 해야 조그마한 교회당이 그 사이에서 푸른 색의 둥근 지붕을 드러낼 뿐이다. 소위 별 볼 것 없는 이 마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외관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모여 사는 방법과 그를 위한 공간의 구조적 풍경에 있었다. 바다로 향한 전망을 확보하기 위해 아랫집의 지붕이 윗집의 테라스가 되고, 넓지 않은 집들은 서로 벽을 공유하고, 때로는 놀이터로 때로는 시장터로도 이용되는 집 앞의 길들은 이 공동체를 엮는 핏줄이었다. 모여서 나누면서 삶을 사는 풍경. 이를 위한 공간을 백색의 대리석 가루로 감싸고 코발트빛 하늘을 바탕으로 빛나게 한 풍경이 지독한 아름다움을 준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김수근 선생의 문하생활 15년을 끝내고 내 건축의 방향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우연히 서울의 달동네를 지나치다가 가난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나누며 살아야 하는 그 마을에 산재해 있는 공간적 지혜가 나를 대단히 각성시켜서 서울에 있는 모든 달동네들을 답사하며 배운 바를 ‘빈자의 미학’이라는 말로 일컫고 내 건축의 화두로 삼겠다고 말한 직후였다. 그런데 그 눈물겨운 달동네의 공간 구조가 이 산토리니 마을의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달동네들은 도시 시설이 미비하고 낙후됐으며 재해에 노출돼 있어 재정비해야 마땅하지만, 시간의 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 공간구조만큼은 관광객들을 맞기 위해 늘 말끔하게 단장하는 산토리니보다 훨씬 진정성이 있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 서울시는 서울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달동네인 중계동 백사마을 일부를 원형대로 보존하며 재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문화생태의 보물창고 같았던 그런 동네들을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무참하게 파괴하던 야만적 행태를 맹비난해 온 나로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옛날 기억을 유지만 하기 위해 박제시키는 게 아니라 그 지혜로운 공간들을 살려서 오늘의 건축으로 되살리기만 한다면, 백사마을은 어느 곳보다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동네’가 될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한 가지 덧붙이면, 키클라데스의 220개 섬은 오늘날에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한 해에 끌어모은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섬들의 풍경은 우리 다도해의 2300개 섬이 이루는 아름다움과는 도무지 ‘쨉’이 되지 않는다.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일 게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이 황홀한 풍경을 찾기 힘든데 왜 이를 관광자원화하지 않을까. 아니다. 못난 우리 세대가 손대면 또 뻔한 몰골을 만들 게니 그대로 놔두는 게 더 맞는 일이다.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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