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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빛, 간접 조명으로 쓰려고 … 기둥 높이만큼 처마 길게 늘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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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호 28면

서울은 궁궐 도시다. 조선시대 5개 궁궐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경운궁이 있다. 이덕수 선생의 신궁궐기행에 따르면 임금과 그 가족들이 살던 집이 궁(宮)이다. 중국에선 궁의 출입문 좌우 망루와 궁을 둘러싼 담장을 궐(闕)이라 한다. 그래서 궁궐이다. 궁궐도 종류가 있다. 왕이 늘 거처하는 ‘제1궁궐’이 법궁, 법궁의 수리나 화재로 왕이 옮겨 머무는 ‘제2궁궐’은 이궁(離宮)이다. 왕실의 필요로 특별히 새로 지은 게 별궁, 왕이 피난이나 나들이 가서 머무는 게 행궁(行宮)이다.

권기균의 과학과 문화 서울 5대 궁궐에 담긴 과학

조선의 법궁은 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경복궁, 이궁은 태종이 지은 창덕궁이었다. 창경궁은 성종 때 지은 별궁이다. 창덕궁·창경궁은 경복궁 동쪽에 있어 동궐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은 모두 소실됐다.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는 16년간 정릉의 행궁에 머물다 승하했다. 뒤를 이은 광해군이 창덕궁을 재건했다. 이때부터 고종의 경복궁 재건 때까지 273년간 창덕궁이 법궁이었다.

성종은 1484년 9월 27일 창경궁을 완공했다. 세종이 즉위한 뒤 상왕 태종의 거처로 수강궁을 지었는데, 60년 후 그 자리에 성종이 자신의 할머니(세조의 비 정희왕후), 어머니(덕종의 비 소혜왕후), 작은 어머니(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위해 별궁으로 새로 지었다.

전각의 용도와 역사·규모를 기록한 궁궐지에는 전체 건물이 창덕궁 1731칸, 창경궁 2379칸으로 되어 있다. 궁의 건물에는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라는 이름을 붙인다. 전(殿)은 왕·왕비·상왕·대비·왕대비가 사는 곳이다. 창경궁에는 정전인 명정전, 사도세자의 비극이 시작된 문정전, 왕과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경춘전, 사도세자의 비로 한중록을 쓴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살았던 자경전(지금은 없어짐), 중종이 승하한 환경전 등이 있다. 전의 한 단계 아래인 당은 세자와 공주, 후궁들이 사는 곳이다. 왕과 왕비가 사용할 수도 있다. 숙종 때 희빈 장씨가 살던 취선당(현재는 없어짐) 외에 양화당·숭문당이 있다. 합과 각은 대체로 전과 당의 부속건물이다. 통명전의 체원합, 경춘전의 동행각 등이 있다. 재와 헌은 왕실 가족과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용했다. 정조가 승하한 영춘헌과 집복헌, 낙선재가 유명하다.

신영훈 선생의 서울의 궁궐에 의하면 헌종은 즉위 후 결혼했는데, 왕비는 3단계로 선발하는 게 법도였다. 마지막 3명 중 한 여인을 간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헌종은 두 번째 여인 김씨가 마음에 들어 그와 왕혼(임금이 선택한 여인과 동거하는 혼인)을 했다. 헌종이 그 여인과 사랑의 보금자리로 지은 곳이 낙선재다. 규모가 430칸이다. 낙선재가 사랑채면 그 안채는 대청마루가 있는 석복헌이다. 낙선재는 지금은 창덕궁 쪽에서 들어가지만, 궁궐지에는 창경궁에 속한다고 돼 있다. 누는 바닥이 한 길 높이 이상인 마루로 된 건물인데, 1층은 각, 2층은 누라고 한다. 정은 정자다. 창경궁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관덕정과 낙선재 담장 안에서 바깥 경치가 잘 보이는 취운정이 있다.

우리 궁궐은 모두 목재 건축물에 기와집이다. 이 대목장 기술은 2010년 한국무형문화 대표 목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됐다. 목재는 소나무만 사용한다. 나이테가 좁고 속이 붉으며 목질이 단단한 적송을 쓴다. 궁궐 도편수 신응수 선생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생육조건이 좋지 않은 음지에서 더디게 자란 영동지방 소나무를 최고로 친다. 벌목도 수분 함유율이 적은 가을이나 겨울에 하고, 3년 이상 건조시켜 비틀림을 막는다. 궁궐은 처마가 깊다. 겹처마로 서까래 끝에 부연을 걸어 기둥 높이만큼 기둥선 밖으로 처마가 나오게 한다. 이것이 대낮의 햇볕을 가려준다. 그러나 어둡지 않다. 천장의 봉황까지 다 보인다. 마당에 떨어진 빛의 반사가 간접 조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는 창경궁에 궐내각사를 헐고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었다. 궁문·담장·전각들도 헐고 잔디를 깔았다. 통명전 뒤 언덕에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1911년 창경궁 명칭도 창경원으로 바꿨다. 연못도 정자도 일본식으로 파고 세웠다. 1922년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1924년부터 야간 벚꽃놀이를 개장했다.

창경궁 뒤의 서울국립과학관은 1927년 5월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상설전시관이 시작이다. 1945년 해방 후 국립과학박물관으로, 49년 7월 국립과학관으로 개편됐다.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가 60년 8월 와룡동 현 위치를 건립 부지로 확정, 72년 9월 국립과학관의 문을 열었다. 73년 박정희 대통령은 창경궁에서 과학관 쪽으로 ‘과학문’을 만들었다. 그 서울과학관은 2014년이면 노원구 불암산으로 이전한다. 창경궁 복원 작업은 83년 시작돼 86년엔 이름도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고쳤다. 그러나 동궐도(사진)의 창경궁을 보면, 창경궁 복원 작업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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