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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6주년 2011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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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빈집 - 백정승

[일러스트=김태헌]

관리인은 내일 아침 여덟 시 정각이라고 못을 박았다. 움 아흐트 우어 퓡크틀리히, 정확히 여덟 시에 자신이 열쇠를 받으러 올 것이며, 또 곧바로 벽을 페인트칠하는 사람이 와서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열쇠를 반납한 그 순간부터 이 집은 더 이상 내가 사는 집이 아니라고 했다. 퓡크틀리히, ‘정확히’라는 단어를 말할 때 관리인의 금빛 콧수염은 빠르고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프, 트, 크, 흐’ 같은 발음을 할 때마다 그의 콧수염은 조금씩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직 마흔 살이 채 되지 않았을 것 같은 관리인은 내게 처음부터 반말을 했다. 아마 무례의 표시라기보다 학생 기숙사 안에서 통용되는 어법을 따라 격의 없음을 표현한 것일 터였다. 그가 말을 낮추었으므로 이쪽에서도 같은 어법으로 말을 해야 자연스러울 것이었으나, 그의 콧수염 때문이었는지 나는 정작 그에게 ‘너’라는 단어를 써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만약 그때까지 청소를 다했는데, 미진한 부분이 발견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니까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 부족하다면?”

 나는 ‘너’나 ‘당신’이라는 주어 대신에 ‘다른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다면 네가 이 집으로 이사 들어오면서 지불했던 보증금에서 청소 비용이 공제되고 청소는 용역에 맡겨진다. 청소 비용이 공제된 보증금은 4주 안에 네 계좌로 입금된다.”

 보증금에서 청소 비용이 깎여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 물은 게 아니라 청소 상태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판단할 것인지를 물은 것이었는데 그는 다만 원칙만을 되풀이했다. 어쩌면 그렇게 원칙만을 주지시킴으로써 일의 집행관은 자신이고, 따라서 청소 상태의 판단도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대답이 틀렸다고 말할 것도 없었고, 더 이상 무엇을 물어 보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그저 청소 검사를 받을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집 안에 있던 내 모든 물건을 밖으로 들어낸 뒤 바닥을 진공청소기로 한 번 밀어내는 것으로 기본적인 청소가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기물의 손실이 없었고, 벽에 새로 칠을 하는 일은 기숙사 측의 소관이므로 열쇠만 반납하면 이 집과의 인연이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관리인이 와서 집의 상태를 점검하고 열쇠를 받아가는 일에 그토록 철저한 청소 검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관리인이 집 안의 구석구석을 손가락으로 지적해 보일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너는 월세 계약서에 명시된 청소에 관한 사항을 잘 읽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는 청소를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마치 새 집과 같아야 한다, 네가 이 집에 살았던 모든 흔적이 완벽히 지워져야 한다, 완벽히.

 페어펙트, 라고 발음하는 순간에도 그의 콧수염은 움찔거리며 그 ‘완벽히’라는 의미에 엄격성과 권위를 더하고 있었다. 이 역시도 예의 ‘프트크흐’ 발음 원리에 따른 현상이었겠지만, 퓡크틀리히나 페어펙트 같은 단어의 의미들이 실은 콧수염을 움찔거리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고, 어쩌면 그 두 단어에 독일인의 성정이 요약적으로 담겨 있는 것 같아 그의 콧수염은 자꾸만 되새겨졌다.

  몇 시나 되었을까. 침대 머리맡의 전자시계가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눈길을 거둔다. 침대도, 침대 머리맡에 있던 작은 서랍장도, 서랍장 위에 언제나 놓여 있던 라디오 겸용의 전자시계도 없다. 서랍장이 붙어 있던 벽의 자리만 먼지를 타지 않은 채 하얗게 남아 나머지 벽면으로부터 흔적을 보이고 있다. 손목시계를 벗어서 가방에 넣어 두었는데. 기숙사 앞뜰의 건너편 공동주택에 몇 개의 창이 아직 불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하얀 리트리버와 그의 주인이 사는 건너편 집 이층의 거실은 아직도 불이 밝혀져 있다. 리트리버의 주인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열 시가 지난 시각일 것이다.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찌든 때 전용 세제를 짜내어 전기레인지의 가열판에 골고루 바른다. 네 개의 동그란 가열판 중에서도 특히 내가 자주 썼던 한 곳의 주변에 가장 많은 얼룩이 짙게 배어 있다. 찌든 때 전용이라는 세제는 앞면의 표지 그림에서 전기레인지가 반짝반짝 윤이 나는 표현을 보고 산 것이다. 뒷면의 사용설명에는 찌든 때가 있는 곳에 세제를 바른 다음 10분 이상 세제의 화학작용을 기다린 뒤 스펀지로 닦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피부에 직접 닿으면 해로우니 반드시 고무장갑을 착용해야 한다는 주의도 있다.

 고무장갑 안쪽에 땀이 가득 찬 느낌이다. 고무장갑을 벗으며 주변을 다시 휘휘 돌아본다. 벌써 몇 번째 같은 짓이다. 유리창을 먼저 닦을 것인지, 주방의 싱크대 주변에 있는 석회 자국을 없앨 것인지, 화장실 청소를 시작할 것인지 생각한다. 관리인은 ‘정확히’와 ‘완벽히’라는 말을 하고도 아직 내가 잘 이해한 것인지 확신하지 않는 듯 청소 작업에서 일반적으로 소홀히 하기 쉬운 부분들이 있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유리창의 바깥 면, 전기오븐 안쪽의 찌든 때, 주방 찬장의 눈이 잘 닿지 않는 맨 위 칸, 하수구 안에 남아 있을 머리카락, 포스터를 붙였던 문에 남은 스티커 자국, 콘센트에 쌓인 먼지 등.

 움 아흐트 우어 퓡크틀리히, 라고 했다. 좀 늦는다면? 가령 오 분? 아니면 십 분? 그냥 여덟 시라고 해도 될 것을, 퓡크틀리히, 라고 강조한 것은 두 번째로 주어지는 청소 검사에서는 관용이 없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가 그 단어를 발음했을 때 함께 진동했던 것은 그의 금빛 콧수염만이 아니었다. 가구가 없는 빈집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사면의 흰 벽과 천장이 그의 단어를 받아 작은 동굴 속에서와 같은 울림을 만들어 냈다. 퓡크틀리히, 라고 말해 본다. 관리인을 흉내 내어 한 번 더 “퓡크틀리히”라고 빈 벽을 향해 말해 본다. P와 T, K와 CH 같은 문자들이 벽에 부딪혀 이리저리 떠돈다. 이번에는 “페어펙트”라고 말한다. P, R, K, T들이 흩어져 침대가 있던 자리, 책상이 있던 자리, 일인용 소파가 있던 자리, 작은 식탁이 있던 자리들을 맴돌고는 사라진다.

 싱크대 밑의 문 안쪽에 누렇게 흘러내린 것은 참기름이다. 영미는 참기름을 종지에 따른 뒤 숟가락에 참기름을 묻혀 김에 발랐다. 숟가락으로 참기름을 조금 떠서 김으로 가져간 다음, 우선 숟가락 밑 쪽에 묻어 있는 참기름을 김에 골고루 발랐다. 그리고 숟가락에 담긴 조금의 참기름을 기름이 묻지 않은 나머지 부분에 조금씩 흘리며 발랐다. 김에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리기 위해 찬장에서 소금통을 꺼내려다가 종지를 건드렸고 참기름이 쏟아졌다. 참기름 좀 닦아줘, 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휴지로 바닥의 참기름을 닦았다. 네 양말에도 참기름이 떨어졌다. 너는 양말을 벗고 내 것으로 갈아 신었다. 겨울 밥상을 받고 싶어 동치미에, 묵은 김장김치에, 참기름에 잰 김, 구운 조기, 아니면 고등어 구이, 장아찌 같은 거 하나! 국은? 된장국? 아니 시래기국! 아아, 다른 건 몰라도 시래기국이나 동치미 같은 건 비행기 타고 한국에 가야 먹을 수 있겠다, 시래기가 어딨어, 동치미 담을 항아리가 어딨어. 인터넷에서 음식 사진들을 내려받아 실물 크기로 인쇄를 하고 식탁 위에 가득 펼쳐 놓았다. 시래기국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동치미에 살얼음이 떠다녔다. 오징어젓갈, 동태찜, 쇠고기장조림 등이 차려졌다. 장아찌도 있었다. 내친김에 콩장도 먹고 싶다고 해서 그것도 찾아 밥상에 올렸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내리는 저녁이었다. 밥상 가득 음식 사진들을 늘어놓고 그 중간에 네가 참기름에 잰 김과 내가 만든 계란말이를 놓았다. 터키 쌀로 지은 밥을 시리얼 그릇에 푸짐하게 담아내자 한국식 겨울 밥상이 차려졌다.

 참기름 자국은 분무기에 담긴 다용도 세제를 뿌리고 스펀지로 몇 번 닦아내자 곧 지워졌다. 참기름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날 네가 김에 바른 것이 참기름이 아닌 올리브 기름이었나. 인근 도시의 아시아 상점에 우편으로 참기름을 주문했던 게 그 겨울 밥상 이후 아니었나. 세제를 헝겊에 묻혀 찬장 맨 위 칸부터 닦는다. 손이 구석에까지 미치지 않는다. 받침을 떼어내 닦는다. 깨끗하게 닦인 받침을 다시 찬장에 끼우려다 말고 잠시 망설인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 남아 있을 잔류 세제를 닦아야 할지 고민한다. 관리인의 청소 검사에는 통과할 것이지만 뒤이어 이 집에 살게 될 누군가는 찬장에 세제가 묻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찬장 칸의 받침을 모두 꺼내 싱크대 위에 늘어놓고 일괄적으로 닦기로 한다. 스펀지에 세제를 충분히 묻혀 각 받침들의 한 면을 닦고 이들을 뒤집어 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 빨간색 계통의 얼룩은 고추장 아니면 토마토 소스이고, 갈색 계통은 간장 아니면 커피나 굴 소스 같은 것이다.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던 저녁과 고추장으로 비빔밥을 만들었던 시간들의 흔적이 삽시간에 지워진다. 무엇인지 모를 어떤 자국들은 스펀지로 공을 들여 닦은 후에야 사라진다. 얼룩을 지운 받침들을 물에 헹궈 세제를 없애고 마른 헝겊으로 물기를 제거한 뒤 다시 찬장에 끼워 넣는다.

 잠시 주저앉는다. 목이 마르다.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마신다. 풀어 놓았던 손목시계를 찾아낸다. 밤 열한 시 반이다. 어디선가 작게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섹스하는 소리다. 위층인가?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무심코 다시 라디오 겸용 전자시계가 있었던 자리로 눈길을 돌린다. 이번에도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침대가 있던 자리에 천천히 몸을 누인다. 바닥의 냉기가 등 전체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여자의 신음 소리가 몇 초간 멈추었다가 이내 이어진다. 아래층으로부터 올라오는 소리다. 가방에 노트북 컴퓨터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음악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대로 잠시 누워 있기로 한다. 아, 하고 길게 소리를 내어 본다. 소리는 빈 방을 울린 뒤 여음을 남기고 사라진다. 나는 그대로 입을 벌린 채 호흡을 몇 번 하다가 입을 닫는다.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아아아, 좀 더 긴 저음으로 소리를 낸다. 좀 더 긴 여음이 빈 방에 맴돌다 사라진다. 호흡을 멈춘 채 입을 벌리고 있는다. 텅 빈 것. 입으로 들어오는 어떤 텅 빈 것. 어떤 깊은 구멍. 아래로 뻗은 깊은 구멍. 어떤 점, 어떤 추상, 어떤 흡입. 구멍 아래 깊은 소실의 점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일거에, 내민 손을 낚아채는 점. 덜컥, 심장이 놀라 퍼덕인다. 몸보다 먼저, 몸보다 무거운 어떤 것이 떨어진다. 눈의 동공이 열리고, 거기에 깊은 점이 피어난다. 데어 쥐드코레아니쉐 엑스프레지덴트 로 이스트 토드, 안게블리히 바 에스 젤브스트모어트,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죽었다, 자살이라고 한다. 그날 아침, 시계의 라디오 알람 기능은 꺼져 있어도 좋았다. 토요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일곱 시 정각에 라디오가 켜지고 어김없이 1분 뉴스가 나왔다. 나는 아직 금요일의 밤으로부터 깨어나지 않았었다. 여자 가슴이 이렇게 작아서, 다이어트를 하니까 가슴도 작아지는 거 있지.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고 원래는 이렇게 컸었다고 너는 말했다, 이렇게. 우리 아이를 가질까?, 숲 속으로 소풍을 가자, 사람이 없는 고요한 숲 속에서 하자, 하늘이 보이는 곳에 누워 아이를 가지고 싶어. 그날 우리는 소풍을 가려 했었다. 오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금요일 저녁, 나는 다만 라디오가 켜지는 전자시계의 알람 기능을 끄는 것을 잊었을 뿐이다. 날씨가 화창했던 오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토이토부르거 숲은 어디에나 인적이 없는 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숲이 아주 깊은 어딘가에는 멧돼지가 살고 있다고 했다. 멧돼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쏜살같이 어딘가로 뛰어 가는 노루나 토끼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이 간혹 지나다니는 길을 벗어나 노루가 방금 지났을 법한 샛길로 무작정 접어들어 걷다 보면 어느새 사방이 굵은 침엽수들로 메워진 숲 속 한 가운데에 서 있곤 했다. 참나물을 딴다고 했던가, 어떤 버섯을 딴다고 했던가, 종종 너는 그런 것들을 따기 위해 숲으로 가자고 했다. 숲 속 깊은 곳에서 보라색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앉아 책을 읽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책을 가져와도 십 분 이상은 읽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는 매번 책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전공 서적을 들고 왔다가 다음에는 소설책을, 나중에는 글자가 별로 없는 책들을 골라서 가져왔다. 식물도감, 간편 중국요리, 스케치 실기, 금연 실천을 위한 조언 같은 것들이었다. 어떤 책의 페이지를 펼쳐도 십 분 이상 손에 들고 있을 수 없었다. 책을 놓고 드러누우면 커다란 나무들이 하늘로 끝없이 뻗어가는 중이었다. 가져온 싸구려 와인을 따서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 교수가 되어서 뭐하게? 밥 먹고 살아야지. 이제 많이 썼으니 금방 되겠네, 교수? 그렇게 금방 되겠어? 잘 해야지. 뭘? 그냥 다 잘 해야지. 논문 말고 다른 거? 뭐든 그렇게 금방 되겠니, 바보야.

 변기에는 변기 전용 세제를, 샤워 부스에는 싱크대에 썼던 것과 같은 석회 제거용 세제를 뿌린다. 석회덩이가 많이 생겨난 곳에는 석회 제거 세제 위에 찌든 때 전용 세제를 덧발라 놓는다. 물이 닿았던 곳마다 물속의 석회가 남아 굳어 있다. 석회 제거 세제로도 지워지지 않는 곳은 칼로 일일이 긁어 내야 한다. 샤워 부스와 세면대의 하수구에는 머리카락 용해제를 흘려 둔다. 각종 세제가 충분히 작용을 할 때까지 타일 벽과 거울에 붙어 있는 흰 점들을 닦는다. 양치질을 할 때 칫솔에서 튄 치약의 흔적이다. 정색을 하고 거울 앞에 선다. 흰 머리칼 몇 올이 올라와 있다. 영미야, 내 흰 머리칼을 뽑아줘. 뭘, 보기 좋은데. 마흔까지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 흰머리라니. 검은 머리칼들이 하얗게 승화하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 이러다 백발이 되어도 같은 말을 할래? 머리카락 뽑지 마. 검은 머리칼들은 그냥 철없이 검은 것이고 흰 것은 이제 하얗게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그 멋있는 걸 왜 뽑나. 샤워 꼭지의 물을 틀어 거울에 뿌린다. 내 얼굴이 이지러진다. 석회 제거제를 뿌려 놓았던 세면대를 주방용 수세미로 닦는다. 석회가 아직 남아 있는 곳은 커터 칼로 긁어 낸다. 이마에 땀이 맺혀 볼을 타고 흐른다. 물에 석회가 섞여 있다니. 이곳은 깊은 바닷속이었을 거야, 먼먼 옛날부터 파도에 밀려온 조개 껍질들이 쌓이고 쌓여 석회층이 된 것이지. 어느 날 바다가 돌출해 육지가 되고, 또 장구한 세월 동안 비가 내리고, 땅에 스며든 물을 석회와 함께 우리가 마시고 쓰는 거지. 하얀 석회의 흔적으로 남은 태고의 조개들. 샤워 꼭지를 들고 뜨거운 물을 틀어 샤워 부스를 닦는다. 작은 욕실이 이내 수증기로 가득해진다. 몸에 왜 이렇게 흉이 많아?, 내 몸에 비누칠을 하다 말고 너는 그렇게 물었다. 무릎에 있는 건 어릴 때 깨진 항아리에 넘어져서 생긴 것, 어깨에 있는 건 우두 자국, 가슴에 있는 건 군대에서 진흙탕에 박박 기다가 철조망에 찢어진 것, 손등에 있는 건 대학 때 데모하다가 화염병 불똥이 튀어서 덴 것, 또 발바닥에는 공사장 아르바이트 하다가 못을 밟아서 생긴 자국도 있고, 옆구리에 있는 건 고등학교 때 했던 맹장수술 자국이고, 아 그리고 중학교 다닐 때 포경수술도 했고. 불쌍한 인간, 다치고 깨지고 그랬구나. 뿌옇게 김이 서린 좁은 샤워 부스 안에서 너는 내 몸의 상처들에 자꾸 비누칠을 했다. 상처 없는 무르팍이 어디 있으랴, 상처 없는 가슴이 어디 있으랴, 상처 없는 손이며 발바닥이 또 어디 있으랴, 상처 없는 옆구리나, 상처 없는 자지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촉수처럼 뻗은 너의 손은 작고 희었다. 좁은 샤워 부스 안에서 네가 몸을 움직이면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나도 몸을 움직였다. 차가운 타일 벽에 등과 어깨가 닿을 때마다 나는 작게 몸서리를 쳤다.

 너의 몸은 깨끗하고 하얬다. 눈이 아득해지도록 피부가 희어서 네 손목을 가르고 있는 그 금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나는 그 한 줄의 금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고양이가 깨물었어, 너는 웃으며 말했었다. 그러고는, 아인파흐 푸버테트, 그냥 사춘기였다고 너는 곧 독일어로 덧붙였다. 함께 밥을 지어 먹거나,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둘이서 노천 카페에 앉아 맥주잔을 부딪칠 때도 나는 그 손목의 금을 보았다. 티 한 점 없이 하얗고 매끄러운 네 살에 선명히 그어진 그 금을 볼 때마다 어떤 막다른 골목과 마주치는 느낌이었다.

 창문을 연다. 창밖의 밤안개가 찬바람에 실려 와락 방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기숙사 앞뜰의 미루나무가 스산한 소리를 내며 남은 잎새들을 날려 보내는 중이다. 어둠에 잠긴 건너편의 공동주택에서 리트리버 주인의 거실 창이 혼자 불을 밝히고 있다. 텔레비전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유리창에서 명멸을 거듭하는 것이 안개 너머로 보인다. 서머타임이 끝난 며칠 전부터 날은 더욱 짧아진 듯하다. 저녁의 어둠이 어느 날부터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찾아온다는 느낌 때문이다. 곧 겨울이 될 것이다. 이때쯤엔 자주 안개가 낀다. 겨울은 안개와 함께 찾아온다. 성탄절이 가까워지도록 안개는 밤마다 창밖에서 유영한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성탄절이 막 지난 그 어느 겨울날에, 나는 내가 서울을 떠나 마침내 어느 멀고 먼 곳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오후 네 시면 벌써 거리가 어두워졌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곧 인적 없는 골목과 거리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안개가 그 길들에 언제나 가득했다. 대학에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밤길에서 언제나 이상한 냄새를 맡곤 했다. 젖은 나무의 냄새, 무언가 동물체가 썩어 가는 냄새, 어느 집 부엌에서 나오는 수프 냄새, 오랫동안 젖어 있는 벽돌의 냄새, 고인 물에서 나는 냄새. 모든 냄새는 안개에 섞여 있었다. 온통 축축하고 기분 나쁘도록 고요하고 음산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지나치게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으리라. 그것은 안개의 힘이다.

 인터넷으로 매일 한국 뉴스를 들여다보고 있는 게 어느 순간 지겨워져서 인터넷을 끊었어, 스스로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게다가 어떤 땐 막 흥분하고 그러잖아? 그러게, 그렇지 좀. 이건 뭐 축구 중계 보는 것도 아니고. 한국 뉴스 보지 않으려고 인터넷을 끊고 신문을 구독했지. 그랬더니 나도 모르게 신문 국제 면에서 한국 관련 기사만 열심히 찾고 있는 거야, 한국 관련 뉴스는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이렇게 살 거면 뭐 하러 비행기 타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온 걸까, 우리.  

[일러스트=김태헌]

선거도 할 수 없는 주제에. 여기 겨울 밤이 너무 적막하잖아, 그런 것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이 지겨운 겨울을 나니? 그러니까 축구 중계 보는 것하고 별다를 게 없다는 거지. 그건 좀 심한 말이고, 그리고 난 축구 싫어해. 옛날에 데모 많이 했어? 독일어로 한국 정치에 대한 뉴스를 듣거나 읽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독일어 개념으로 이해하고 그걸 또 머릿속에서는 한국어로 번역하고, 어떤 것들은 독일어로 그냥 받아서 소화해 버리기도 하고, 그러는 것. 실은 그 독일어 필터의 문제가 아니라, 예컨대 이런 것 아닐까, 여기 이러고 있는 한 북한의 폭탄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은근슬쩍 인식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그것을 인식해서라기보다 그렇게 인식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나면 좀 떨떠름하지. 가령 대통령 탄핵이나 촛불 데모는 내게 현실일까 아닐까. 아, 그래 그런 걸 두고 ‘지금/저기’의 의식이라고 해야겠네, 히히. 그런데 넌, 넌 정말 여기 왜 왔니? 아, 난 그냥 심심해서 왔지. 도망쳐 온 것은 아니고? 무국적자가 되어 볼까 생각 중이야, 언젠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려워.

 창문에 파리 똥들이 붙어 있다. 지난 여름날의 흔적이다. 바깥이 어두운 탓에 유리창 표면의 얼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분무기의 다용도 세제를 유리창 전체에 충분히 뿌린 뒤 그저 골고루 걸레질을 한다. 설마 내일 아침 관리인이 와서 유리창의 파리똥이 모두 지워졌는지 확인할까? 파리똥이 몇 개 남았다면 불합격 판정을 할까? 불합격 판정을 받는다면 보증금에서 얼마만큼의 청소 비용이 깎이는 것일까. 파리 똥 하나당 오십 센트? 청소를 전혀 하지 않고 이사를 간다면 얼마의 청소 비용이 보증금에서 공제되는 것인지, 그것을 알아보지 않았다. 단순 노동으로 반나절 일당? 단순 노동이니까 시간당 칠팔 유로라고 하면 네다섯 시간의 작업으로 삼십에서 사십오 유로쯤? 넉넉잡아 오십 유로? 청소를 하기 위해 샀던 세제 등의 비용이 얼마였는지 생각해 본다. 찌든 때 전용 세제, 석회 제거 세제, 다용도 세제, 세면대와 샤워 부스 하수구에 넣을 머리카락 용해제, 특수 스펀지와 청소 전용 걸레, 질 좋은 청소 전용 고무장갑 등이 그것이다. 유리창 전용 세제와 밀대, 전기오븐 전용 세제, 싱크대 밑 플라스틱 하수관의 음식 찌꺼기를 녹이는 용해제 등은 망설이다가 결국 사지 않았다. 바닥을 닦는 대걸레는 가지고 있던 것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썼다. 꼭 필요한 것만을 산다고 골랐는데 모두 삼십 유로 정도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십 유로, 잘해야 이삼십 유로쯤을 절약하기 위해 이 밤에 빈집에 남아 홀로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청소 비용에 관한 손익계산을 관리인과 상의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관리인조차 청소 비용을 공제하도록 하고 이사를 하는 게 났다는 조언을 하지 않았을까. 그의 입장에서도 청소 검사를 하는 대신 작업을 용역에 일임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간 살면서 한번도 이렇게 말끔하게 청소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이사를 나간 뒤에 들어올 누군가를 위해 집을 가장 깨끗한 상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안쪽 면을 다 닦은 후 창을 열고 바깥 면을 닦기 시작한다. 건너편 공동주택의 이층 발코니에서 빨갛고 작은 불빛이 깜박거린다. 리트리버 주인이 담배를 피우는 중이다. 밤늦은 시각에 그의 발코니에서 담뱃불이 깜박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다. 기숙사 앞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두 건물의 같은 층에 살다 보니 그의 단조롭기 짝이 없는 일과를 알게 되었다. 독신이고, 덩치 큰 흰색의 늙은 리트리버종 개가 유일한 가족이다. 집 안에서 일하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장기간 실업자다. 밤늦도록 거실에 텔레비전을 켜 놓고 있고, 오후에는 빠짐없이 리트리버와 함께 산책을 한다. 그는 아주 천천히 걷는다. 무언가 진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거나, 아니면 걷는 일을 통해 어떤 수행이라도 하는 듯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걸음이다. 산책길 위의 그를 처음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가 맹인이거나 어떤 재활 치료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토록 느린 걸음과 맹인견종인 리트리버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시선이 눈뜬 장인의 것을 연상케 했다. 눈길은 앞으로 향해 있지만, 실제로는 무엇도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단지 앞으로 향한 채 단단히 고정된 눈이었고 자신의 세계에 고요히 갇힌 사람의 얼굴이었다. 일주일 이상 자라난 수염이 입 주위를 덮고 있었고, 길고도 깊게 파인 인중이 입을 단단히 잠그고 있는 듯했다. 행복도 불행도 없는 적막한 얼굴. 그의 곁을 늙고 호기심 없는 개가 주인과 마찬가지로 느리게 걸었다. 산책길에서 그들과 마주치는 일도 이제는 없을 것이다.

 나도 담배를 피우고 싶다. 그렇다, 이럴 땐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가방을 뒤져 담배를 찾는다. 가끔 이렇게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를 위해 언젠가 가방 깊숙이 넣어 두었건만 보이지 않는다. 없다. 창밖 건너편에서 그의 담뱃불이 아직 깜박이고 있다. 그에게 담배를 청해 보기로 한다. 어쩐지 그가 선뜻 한 개비를 건넬 것 같다.

 기숙사 앞뜰을 건너 그의 발코니를 향해 걷는다. 그는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그의 발코니 밑으로 다가서서 담배를 청한다. 망설임 없이 그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뒤 사라진다. 그도 분명 나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잠시 후 현관으로 그가 나온다. 그의 손에는 아직 불붙은 담배가 들려 있다. 담배를 원한다고 했나요?,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요, 대신 이것을 말아서 피우지요. 그것은 마리화나이군요. 피울래요? 그가 내민 것을 받아 한 모금 들이마신다. 건초를 태운 향이 목 안으로 가득 밀려든다. 이사를 가나요? 네. 그에게 조금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도 발코니에서 마리화나를 피울 때마다 나를 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기숙사 건물에서 내 방의 넓은 창만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당신은 중국인인가요? 아니, 한국인입니다. 가로등 빛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유독 창백해 보인다. 눈 밑의 주름과 인중도 더욱 깊게 파였다. 마리화나에 불이 꺼졌군요, 담배처럼 그냥 들고만 있으면 곧 불이 꺼져요.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건넨다. 불을 붙여 한 번 더 깊숙이 건초 향을 들이마신다. 당신의 애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요, 떠났나요?, 실례가 되었다면 미안, 여기에서 당신의 집이 보여요. 네, 떠났습니다. 그녀는 멀리 갔나요? 아마도 그렇습니다. 유감이군요. 나는 그것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저 집을 떠나는군요. 네, 지금이 마지막 밤입니다.

  오래된 친구를 뒤로하고 돌아서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는 어쩌면 아직도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른다. 행운을 빕니다, 그가 말했다. 기숙사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조금씩 머릿속이 아득해지기 시작한다. 건초 향 탓이다. 행운을 빕니다, 라고 말했을 때 그가 미소 지었던가?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된 친구를 뒤로하고 돌아설 때는 가다가 반드시 한번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아야 할 것만 같다. 그가 아직 그대로 서서 눈으로 나를 전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 뒤에 서서 내 뒷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뒤에 남겨진 그에게 내가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떤 갚지 못할 빚을 지고 도망치는 중이라는 느낌이 든다.

[일러스트=김태헌]

행운을 빌다니, 그는 그런 인사치레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된다면, 당신은 왜 그렇게 천천히 걷나요?, 그에게 그렇게 물었던 것은 건초 향의 힘이었다. 난 그냥 너무 빨리 걷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빨리 걸으면, 모든 일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실은 그게 무서워요. 사람들이 모두 옆을 지나쳐 내 앞으로 갈 때 나는 그들을 보지 않으려 노력해요. 그들 뒤에 홀로 남더라도 나는 그들보다 천천히 가는 나만의 템포가 있다는 게 좋아요.

  어지럽다. 하지만 바닥을 청소하는 일이 아직 남았다. 피브이시 바닥재가 깔린 바닥은 어떻게 청소를 해야 하는 것인지 잠시 고민한다. 창밖으로 건너편 공동주택을 바라본다. 그의 집 거실에도 불이 꺼져 있다. 맨발로 다니는 바닥을 일반 세제로 청소해도 되는 것인지 망설여진다. 영미가 한번은 맨발로 다니니 발이 시리다고 했다. 내 발등에 올라서 붙안고 있다가 블루스를 추었던 적이 있다.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어 벽을 짚는다. 갑자기 전등이 꺼진다. 벽을 헛짚어 스위치를 누른 것이다. 창밖 골목 어귀의 가로등 불빛이 빈 방에 희미하게 스민다. 서른 제곱미터 남짓의 방이다. 벽에 어깨를 기댄 채 스르르 주저앉는다. 매야옹, 그것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다. 매야옹,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듣고 나서 그것이 다만 어디선가 나는 고양이 울음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까지 잠시의 시간이 걸린다. 은연중에 건초 향을 몇 번 연달아 들이마셨던 것 같다. 보고 느끼는 것과 그것을 깨닫는 것 사이에 속도의 차이가 생겨난다. 속이 메슥거린다. 손에 그에게서 받은 일회용 라이터가 아직 쥐여 있다. 두 번이나 마리화나의 불을 꺼뜨려 새로 붙여야 했다. 라이터를 켠다. 작은 불꽃이 환하게 피어 오른다. 손가락을 떼자 불꽃은 곧 사라진다. 다시 라이터를 켠다. 손가락을 뗀다. 켠다. 끈다. 다시 켠다, 너는 주방에 서서 등을 보이며 무언가 칼질을 하고 있다, 나는 네 뒤로 다가가 너를 안는다, 네 머리칼이 코를 간지럽힌다. 끈다. 다시 켠다, 너는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다, 신문을 읽는 중이다, 어두운 날이다, 내가 전등을 켜자 네 얼굴이 환해진다, 당케, 라고 너는 말한다. 끈다. 켠다, 창가에서 손으로 턱을 괴고 너는 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다, 저쪽이 우리 엄마 무덤이 있는 동쪽일거야, 라고 말한다, 손톱 끝으로 창문을 톡톡 두드린다, 나는 그 옆에서 너와 똑같이 턱을 괴고 같은 하늘을 바라본다. 끈다. 켠다, 침대 위에서 우리는 서로 붙안고 헐떡인다, 어두운 대낮이다, 끈다.

 노트북의 음악 파일에서 ‘홀리데이’를 찾아 재생시킨다. 대통령이 자살했던 날, 계획했던 소풍을 취소했던 날, 그날 저녁에 그 한국영화를 보았다.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영화였다. 감옥을 탈출한 탈옥수들이 가정집에 들어가 인질을 붙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주인공이 “무전유죄 유전무죄”라고 세상을 향해 외쳤다. 대한민국이 좆 같다고, 절망적으로 외쳤다.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흘렀다. 주인공이 푸른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유리 조각으로 목을 그어 자살했다. 최민수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지 않아?, 하고 물었다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래, 하고 말했다가, 너는 느닷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어떻게 그냥 죽나, 어떻게 그냥 그렇게 죽나. 잇츠 언카인드, 잇츠 언카인드, 노랫말이 반복되었다. 그날은 오월의 어느 휴일이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소풍을 가려고 했었다.

 입 안에 신 침이 고인다. 구역질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화장실로 간다. 변기 덮개를 열자 기다렸다는 듯 토사물이 쏟아진다. 띠띠띠띠띠 디, 노래의 마지막 부분은 자조적이다. 띠띠띠띠띠 디. 사랑하면 상처 받는 거래요……. 마지막 이메일에서 너는 느닷없이 존댓말을 했다. 박사논문 완성한 것 다시 한번 축하해요. 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언젠가 당신의 뒷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어쩌면 헤어져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생기기 전에, 그냥 갈게요. 돌아가거든 부디 잘 지내요. 난 이제 누구와도 한국말로 말하지 않을 거예요. 언젠가는 한국말을 깡그리 잊어 버릴지도 모르지요. 때로 외롭겠지요. 하지만 난 괜찮을 거예요……. 한 번 더 울컥, 위가 경련하며 남은 것을 게워낸다. 나는 진저리를 친다. 춥다. 오래도록 변기 위에 고개를 숙이고 토사물을 본다.

  집의 전등을 모두 켠다. 빈 생수 병에 수돗물을 받은 뒤 거기에 식기 세척용 세제를 조금 흘려 넣는다. 생수 병의 마개를 닫고 세게 흔들자 물과 세제가 뿌옇게 섞이며 거품이 생긴다. 식기 세제는 인체에 무해하다고 했다. 기름기를 없애는 거품일 뿐이라고 했다. 생수 병의 물을 골고루 바닥에 뿌린다. 남색의 바닥에 물과 거품이 퍼진다. 대걸레 자루를 쥐고 바닥 전체를 닦는다. 침대의 다리가 있던 자리에 찌든 때가 네 개의 동그라미로 남아 있다. 찌든 때 전용 세제를 스펀지에 묻혀 그곳만 닦아낸 뒤 다시 대걸레로 문지른다. 옷장과 책장이 있던 자리에도 비슷한 얼룩들이 남아 있다. 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 모든 얼룩이 지워진다. 대걸레를 빨아 물을 짜낸 뒤 다시 바닥을 닦는다. 가져온 마른 헝겊들을 모두 모아 바닥에 남은 물기를 닦아 낸다. 이마에 땀이 맺힌다. 몇 시나 되었을까, 또다시 라디오 겸용 시계가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가 눈길을 거둔다. 벽과 천장을 제외한 모든 것에 세제를 뿌리고 닦아 냈다. 내일 사람이 와서 페인트칠을 하고 나면 누군가가 살았던 흔적은 모두 지워지고 중성화된 하나의 공간이 남을 것이다. 갖가지 세제를 모아 비닐 봉투에 담은 뒤 가방에 넣는다. 더러워진 헝겊과 걸레는 버리기로 한다.

 청소 검사를 받고 열쇠를 전해주기 위해 다시 이 방으로 들어오는 대신 건물 현관의 내 편지함에 열쇠를 넣어 두고 가기로 한다. 관리인은 건물 안의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으므로 이 방으로 들어올 수도, 편지함을 열 수도 있다. 가방에서 필기도구를 꺼내 관리인에게 짧은 편지를 쓴다. 친애하는 관리인, 나는 내가 이곳에 살았던 모든 흔적을 지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벽에 페인트칠을 새로 하고 나면 이곳은 마치 새 집처럼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해 남겨진 흔적이 있다면 그에 대해 관리자 측의 처분에 맡기겠다. 이곳에 살았던 모든 작은 흔적까지 아주 완벽히 지우기란 사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당신이 판단할 것이다. 열쇠는 편지함에 넣어 두고 간다. 용서를 구한다.

 가방을 메고 쓰레기봉투를 한 손에 든다. 문을 연다. 스위치가 있는 곳으로 손을 뻗어 더듬는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스위치를 내린다. 뒤에 남겨진 방이 어둠에 잠긴다. 복도로 나와 문을 천천히 닫는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돌아서지 않는다. 열쇠를 문의 자물쇠 구멍에 집어넣고 두 번을 연속해 돌린다. 이중의 잠금쇠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리고 열쇠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다. 편지를 접어 문틈에 끼워 넣는다. 복도를 걸어 나온다. 사실은 어떤 흔적도 완벽히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라는 문장을 편지에 넣었더라면 관리인이 어떻게 받아들였을 것인지, 나를 지나치게 방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상상해 본다. 계단을 내려와 현관문 앞 편지함에 이른다. 열쇠고리에서 열쇠를 분리해 편지함에 집어넣는다. 기숙사를 빠져나온다. 쓰레기를 버린 뒤 걷기 시작한다. 몇 발짝 걷다 말고 쓰레기통으로 돌아간다. 가방 속에서 세제들이 담긴 비닐 봉투를 꺼내 쓰레기통에 넣는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고요하다. 기숙사 건물의 내가 살았던 방의 창을 흘끗 올려다본다. 불 꺼진 창이다. 조금 걷다 말고 돌아서서 건너편 공동주택을 본다. 불 꺼진 창이다. 천천히, 다시 걷는다.

 기숙사가 있는 골목의 어귀를 벗어난다. 안개가 아직도 자욱하다. 나는 조금 속도를 내어 걷기 시작한다.

- 끝 -

소설 당선 소감

불현듯 써 내려간 문장들…20년을 접고 지낸 꿈 이뤄

돌아가신 어머니께 이 소식을 전한다면 아마 그곳에서 한바탕 웃으실지 모르겠다.

 “예끼 이 사람아, 문학공부를 한 지 이십 년 되었다면서 이제야! 남사스러운 줄 알아라.”

 그럼요. 잘 알아요, 어머니. 그런데요, 어리숙해서 일이 좀 늦어졌더라도, 사람이 자기 할 일은 하면서 살아야지요.

 엊그제 지갑 속에서 영수증 하나를 찾아냈다. 동네의 작은 우체국에서 원고를 서울에 보낸 뒤 받은 영수증이다. 일반우편이었고 3유로45센트가 들었다. 원고를 부칠 때 비싼 우편 상품을 이용해야 할지, 최소한 등기로 부쳐야 하는 것은 아닐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가장 저렴한 일반우편으로 했다.

응모 마감에 맞추어 투고하는 것에 우선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의 기대를 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벌써 나이가 그렇게 된 것인지, 한국을 떠나온 시간이 길었는지 모종의 각별함이나 절실함이 없으면 도무지 어떤 글을 쓴다는 것도 매우 어려워진 것 같았다. 사실 이번 응모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이미 하나의 성과였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건 스무 살 적 일이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그 꿈을 접고 살았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들을 써 내려 갔는데, 당선 소식이 들려왔다.

 단 한 편이라도 좋은 작품을 써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단 한 순간이라도 작품을 쓰며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스무 살과 서른의 날들에 문학을 공부하며 만난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심사위원님들과 중앙일보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린다.

 ◆백정승=1971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 현재 독일 빌레펠트대 문예학 박사과정 재학.

소설 심사평

정교하게 다듬은 시간과 공간…보석 세공 하듯 완성도 높여

소설 본심 심사 중인 성석제(왼쪽)·김형경씨. [변선구 기자]

본심에 올라온 10편의 작품은 각각 개성적인 목소리와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 날로 다양해지는 삶과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 바, 문제는 얼마나 그 속살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김개영의 ‘하얀 그림자’는 중국 내륙의 학교라는 색다른 시공과 그곳에 스스로를 유폐한 인물을 다룬 작품이다. 시점이 여러 가지로 나눠져 있어 혼란스럽고 마무리가 분명치 않은 점이 걸렸다.

 이정연의 ‘풍경’은 사랑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관능적이고 섬세한 묘사가 시선을 끌었다. 끈끈한 문장이 보여주는 힘에 걸맞게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이었으면 한층 좋았을 것이다.

 김단은 ‘ㅁ’을 통해 언어에 예민한 촉수를 보여준다. 천재지변과 종말을 연상케 하는 상황 속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이따금 지나치게 멋을 부린 형용사나 특이한 동사와 명사가 눈에 걸렸다. 평이하고 간결한 문장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고립과 단절을 자초하는 문장과 단어를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김교은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읽는 사람을 즐겁게 만든다. 수많은 불평등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영혼이 적당한 비판의식과 체념, 속물성, 중구난방, 제 나름의 우월성 즐기기로 이 시대를 헤쳐 나가는 방식이 자유롭고 자연스럽다. 다만 이러한 모습 자체가 어쩐지 작위적 설정 같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백정승의 ‘빈집’은 정교하고 섬세하다. 작품 속의 시공은 작가의 집요한 의지와 정확한 손길에 의해 완벽하게 장악되고 해부되어 소설로 피어난다. 문장은 가볍고도 단단하며 정확하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 충분히 잘 알고 있는 데서 출발해 구체와 일상의 전개 과정을 거쳐 불안과 미지의 영역에 도달하는 모습이 보석 세공을 연상케 하는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모든 분의 정진을 바란다.

◆본심 심사위원=김형경·성석제(대표 집필 성석제)

 ◆예심 심사위원=김숨·전성태·정영훈·편혜영

소설 본심 진출작(10편)

● 김개영 : 하얀 그림자
● 김교은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김남희 : 더리 올드 맨
● 김단 : ㅁ
● 김민경 : 냉장고와 배
● 백정승 : 빈집
● 윤시아 : 눈 위에 남은 핏자국
● 이정연 : 풍경
● 이정현 : 여행가방
● 정씀 : 경도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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