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마운드서 안경 올리는 동작만 봐도 타자들 기죽어”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전무후무(前無後無)라는 표현을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후배 기자가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고 기사를 보내오면 “지금까지 없었던 건 맞는데 앞으로 없으리라고 누가 장담하나”라고 면박을 준 뒤 전인미답(前人未踏) 정도로 고쳐 준다.

그런데 한국 프로야구에서 전무후무할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두 가지 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최동원이 올린 4승, 그리고 87년 5월 16일 최동원과 해태 선동열, 두 투수가 15회 연장을 완투하며 던진 공의 숫자를 합친 441(선동열 232개, 최동원 209개). 투수의 분업화와 선수 보호의식이 생겨나기 전인 프로야구 초창기였기에 나올 수 있었던 기록이었다. 두 기록의 주인공이었던 최동원이 우리 곁을 떠났다.

추석 연휴를 마치고 출근한 아침에 부음을 들었다. 그날 저녁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을 찾았다. 영정 속 고인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영안실은 쓸쓸했다. 최동원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누굴까 생각했다. 부친 최윤식씨는 2003년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롯데에서 6년간 황금의 배터리를 이뤘던 포수 한문연(50·사진)이 아닐까. 6년간 같은 방을 썼고 훈련과 경기에서 수만 개의 공을 받아 줬던 그 사람. SK 배터리코치를 맡고 있는 그를 SK가 서울 원정 때 숙소로 쓰는 청담동 리베라호텔에서 만났다. 최동원의 2년 후배인 한 코치는 “지난 7월 경남고-군산상고 레전드 매치 때 뵈었는데 너무 수척해 보여 다음 날 전화해서 ‘행님, 뭔 일 있능교’ 했더니 ‘식이요법 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아이가. 시골 가서 살찌워서 올 테니까 시즌 끝나면 저녁 먹으면서 옛날얘기도 하자’ 하셨는데 그게 마지막 통화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로진백 터는 모습에도 카리스마
-최동원과의 첫 만남은.
“내가 동아대 4학년 때다. 동원이 형님이 한전 있을 때인데 아버님이 공 좀 받아 달라고 부탁하셔서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처음 봤다. 당시 최고의 투수여서 공 받는 것만 해도 영광이었다. 온몸을 용틀임해 위에서 내려꽂는데 ‘와, 이런 볼도 있구나’ 싶었다. 금테 안경을 써서 인상은 차가워 보였고, 처음에는 좀 어려웠다. 투수들은 마운드에서 혼자 모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자기 세계가 강하다. 형님도 야구만을 생각하는,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굉장히 순하고 사근사근한 성격이었다. 자존심이 강해 속마음은 잘 내비치지 않았지만.”

-6년간 룸메이트를 하며 힘들었던 점은.
“경기 전날 일찍 불을 꺼야 했던 게 힘들었다. 선수들은 대부분 다음 날 저녁 경기가 있으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데 형님은 오후 9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며 경기를 준비했다. 야구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했다. 밤마다 술 마시러 가는 선배들이 많았는데 형님은 술ㆍ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야구에 대한 열정은 존경할 만했다.”

-최동원만의 특별한 훈련법이 있었나.
“롱 토스(공을 멀리 던지는 것)를 많이 했다. 100m 넘는 거리에서 던져도 ‘슉슉슉’ 하면서 공이 살아 들어왔다. 다시 던져 줘야 하는 내가 힘들었다. 몇 번 하다가 ‘행님, 완방(원바운드)이요’ 하면서 원바운드로 던져 줬다. 요즘 선수들은 어깨 상한다며 그렇게 멀리 던지지 않는다. 형님은 늘 야구공을 갖고 다니며 새로운 구종을 개발했다. 경기 때는 직구·커브·슬라이더만 던졌지만 훈련 때는 너클볼도 던졌다. 공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날아와 제대로 잡지도 못했다. ‘행님, 그거 하지 마이소’ 하면 ‘야, 그것도 못 잡나’ 하면서 킬킬 웃었다.”

-투구 폼이 매우 독특했는데.
“투수로서는 키(1m79㎝)가 크지 않고 체격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온몸을 활용해 공에 속도와 힘을 실었다. 왼발을 얼굴까지 하이킥을 하고 등 뒤에서 오른팔을 끌고 나오려면 엄청난 체력과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그 동작으로 매년 200이닝 이상 던졌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은퇴한 조계현이나 SK 김광현의 투구 폼이 다이내믹한데 형님만큼은 아니다. 요즘은 체력을 아끼기 위해 모든 동작이 간결해졌다. 형님 동작은 어린 선수들에게 따라 하라고 시킬 수 없고, 따라 할 수도 없다.”

롯데 떠나서도 마음은 언제나 롯데
-마운드에서 습관은.
“로진백(송진가루)을 털고, 허리 숙여 스타킹을 당겼다 놓고, 안경을 올리고 하는 독특한 의식이 있었다. 형님은 습관으로 했지만 타석의 타자들은 그 장면만 봐도 기가 죽었다. 마운드에서는 늘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난 자신 있거든. 너는 내 공 칠 수 없거든’ 하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홈런을 맞아도 씩 웃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형님이나 선동열 같은 선수들은 마운드에 서 있기만 해도 카리스마가 넘쳐 흘렀다. 후배 투수들에게도 그런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본받으라고 늘 얘기한다.”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았을 텐데.
“84년 한국시리즈 때로 기억한다. 경기 전날 일찍 불을 끄고 잠들었는데 누가 ‘띵똥’ 하며 벨을 눌렀다. 나가 보니 버버리 코트를 입은 늘씬한 여성이 서 있었다. 깜짝 놀라고 겁도 나고 해서 ‘뭐요, 누구요’ 했더니 ‘저, 최동원씨 계신가요’라고 물어보더라. ‘없어요. 돌아가세요’라며 돌려보냈다. 원정 경기 때는 막무가내로 숙소 문을 두드리는 여성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형님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롯데와는 애증이 교차했는데.
“88년 겨울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결성에 형님이 앞장서면서 구단과 틀어졌고, 결국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프로야구 최고 연봉을 받고 있던 형님은 다른 선수들의 어려운 형편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형님은 은퇴한 뒤에도 ‘야, 우리 옛날 있었던 사람끼리 모여 함 해 보자. 누가 감독 되더라도 같이 뭉치자’고 늘 얘기했다. 형님의 마음은 늘 롯데를 향하고 있었다.”

롯데는 뒤늦게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 시키기로 했다. 그의 모교 연세대는 최동원 야구장을 짓기로 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최동원ㆍ장효조 등 먼저 간 영웅들을 기리는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고 한다. 야구공을 갖고 하늘나라로 간 최동원은 지금쯤 장효조를 상대로 공을 던지고 있지 않을까.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