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뒤흔든 ‘자유부인’...특무대 끌려가 고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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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작가 손소희(1917~87)의 문인들에 대한 인물평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정곡을 찌르는 묘미가 있다. 때로는 치켜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아픈 곳을 건드리기도 하지만 겉모습과 함께 내면까지 꿰뚫어보는 나름대로의 예리함이 있었다. 선배 소설가 정비석에 대한 인물평은 그런 까닭에 문단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그 정(비석) 선생께서는 그러나 언제라도 웃음을 웃고 있는 그러한 호랑이의 인상이었다. (중략) 군자의 인품을 풍기고 있었고 그야말로 뿌리 깊은 나무를 문득 연상케도 하는 예의 바른 분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그중 오래된 토속 신이 살고 있는 ‘성황당’을 기점으로, 한 시대의 첨단을 걷는 『자유부인』의 위험한 곡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받은 갈채 속에는 그늘진 면의 정화에 밑거름이 되었다 해서 보낸 박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포효하고 으르렁대는 호랑이가 아니라 인간의 약점에 즐겨 도움을 주는 산의 신령 같은 그러한 내면이 그 관상 속에 들어 있지나 않은지.…”

아닌 게 아니라 손소희가 ‘위험한 곡예’라 표현한 『자유부인』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비석은 문학적으로 주목 받는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일제 말기에 쓴 몇몇 작품이 훗날 그를 ‘친일’ 명단에 포함되게 하는 불명예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정비석은 데뷔작 ‘성황당’을 비롯해 ‘졸곡제’ ‘고원’ 등 초기의 많은 작품에서 작가적 역량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1911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정비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 문과를 중퇴하고 귀국해 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졸곡제’가 입선,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이 당선해 등단했다. 40년부터는 매일신보 기자로, 광복 이후에는 중앙신문 문화부장으로 언론계 생활을 거치기도 했다.

정비석의 소설가적 생애에 큰 전환점을 이룬 작품이 54년 1월 1일부터 8월 9일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된 장편소설 『자유부인』이었다. 6·25전쟁 이후 성도덕의 몰락 등 퇴폐적 사회상을 실감 있게 묘사한 이 소설은 대학교수의 아내가 남편의 제자인 대학생과 탈선하고, 남편인 대학교수는 미군부대 타이피스트와 사랑에 빠진다는 통속적 내용이었다. 이 소설은 연재 중에는 물론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후에도 선풍적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여대생 등 70여 명의 여성을 농락한 세칭 ‘박인수 사건’과 맞물리면서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독자도 많았다.

56년 한형모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이 몰리는 등 『자유부인』의 대중적 인기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으나 후폭풍 또한 만만치 않았다. 연재 도중 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의 비판과 정비석의 반론으로 시작된 작품을 둘러싼 논쟁은 홍순화 변호사와 백철 평론가 등의 가세로 계속 이어졌고, 마침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특무대가 정비석을 연행하기에 이르렀다. 사회 혼란을 부추긴다는 이유였다. 정비석은 고문을 당한 끝에 풀려났으나 『자유부인』을 비롯한 그의 소설들은 판매금지 조치됐다. 어쨌거나 『자유부인』은 광복 이후 소설의 윤리성과 창작의 자유 문제를 처음 제기한 사례로 남게 됐다.

60년 4·19혁명으로 정비석의 작품에 대한 판매금지 조치는 해제됐으나 그에게는 또 다른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해 5월 18일부터 한국일보에 소설 ‘혁명전야’의 연재를 시작했다. 대학생들을 등장시켜 학생혁명의 참뜻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려는, 그로서는 전혀 색다른 시도였다. 한데 겨우 4회째가 나간 5월 21일 아침 연세대생 400여 명이 정비석의 후암동 자택으로 몰려가 연재 중인 소설 ‘혁명전야’를 당장 중단할 것과 공개 사과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소설 속에서 ‘특별히 연세대 학생들을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한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 전날 3회분에 실린 다음과 같은 대목을 문제 삼은 것이다.

‘…돈이 생기면 서울대 학생들은 책을 사고, 고려대 학생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연세대 학생들은 구두를 닦는다’는 내용이었다.
학생들 앞에 나선 정비석은 작의를 설명하고, 자신도 연세대생의 학부모(장남 천수가 영문과 1학년이었다)로서 연세대를 폄하할 까닭이 있겠느냐고 설득했으나 학생들은 막무가내였다. 학생들은 정비석을 떠메듯이 한국일보사로 끌고 가 전날 ‘연세대생, 백낙준 총장 사퇴 요구’ 제하의 기사 문제로 농성 중이던 또 다른 수백 명의 학생과 합류해 장기영 사장의 면담을 요구했다.

마침내 학생들 앞에 나타난 장 사장은 백 총장 관련 기사가 잘못됐다면 정정하겠으나 소설은 중단할 수 없다고 맞섰다. 대다수 학생이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일부 강경파 학생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정비석과 장기영은 별 수 없이 학생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곤욕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이후 정비석의 창작 의욕은 가속도가 붙어가고 있었다. 60년대에서 70년대를 거치는 동안 그는 주로 신문 연재를 통해 『여인백경』『욕망해협』『노변정담』 『명기열전』 등 대중 성향이 짙은 선정적 작품들을 내놓았다. 특히 그의 나이 70대에 이르는 80년대에는 주로 역사물이나 중국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 『소설 명성황후』『손자병법』『초한지』『김삿갓 풍류기행』 등을 발표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정비석은 문학, 특히 소설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남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즉 문학에는 대중성과 예술성이 공존하게 마련인데 어느 한쪽에 치우치다 보면 다른 한 쪽을 잃게 된다는 것, 어느 쪽에 치중하느냐는 것은 작가 자신의 문제지만 자신으로서는 그 우선순위를 대중성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문학의 순수성이나 예술성에서 다소 밀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문학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는 그가 기여한 바도 전혀 무시해버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정비석은 91년 10월 19일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정규웅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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