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재정 대책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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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신세철
성도회계법인 부회장

글로벌 금융시장이 휘청거리는 까닭이 갈수록 늘어나는 선진 경제권의 정부 부채 때문인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부채의 함정에 이미 빠졌거나 빠지기 직전 상태에 있는 나라들이 한둘이 아니고, 오랫동안 누적되어 쌓인 빚을 하루 이틀에 해결할 수단이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만 해도 베트남전 이래 지금까지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즉 쌍둥이 적자가 누적되어 왔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미봉책이 금융시장을 일시적으로 진정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대책이 아니어서 위험과 혼란은 눈앞에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현재의 금융시장 혼란이 곧 수습될 수 있다는 낙관론은 서투른 짐작이다.

 부채의 터널을 벗어나려면 길고 긴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재정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간단히 말해 세수를 증대시키거나 아니면 정부의 씀씀이를 줄이는 일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먼저, 세수를 늘리는 일은 지금과 같은 공급과잉 경제체제에서 쉽지 않다. 중국 혼자서도 전 세계가 사용할 공산품의 2배 가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나라는 대부분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있어 소비 기반이 자꾸 취약해지고 있다. 이처럼 유효수요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불황을 극복하고 세수를 늘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부채로 촉발된 세계적 불황이 도래한다면 세수가 더 줄어들어 재정적자의 증가 속도가 빨라지는 악순환에 빠질 우려도 있다.

 그렇다면 정부의 씀씀이를 줄여 정부부채를 줄이는 일인데 이는 모라토리엄 같은 한계상황에 이르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이 세상 모든 정치인·관료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려는 할거주의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획기적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는 정부부채는 야금야금 늘어나게 되어 있다. 당장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들만 보더라도 빚투성이 상태에서 호화 청사를 무턱대고 짓고 있다.

 불황의 늪을 건너기 위한 정책은 재정완화와 유동성 완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빚의 덫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 재정 확장 정책은 사실상 어렵다.

 이럴 경우 남아 있는 선택은 어쩔 수 없이 유동성을 팽창시키는 방법뿐이다. 고통스러운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면 화폐가치는 떨어져 실질적 재정부채의 크기는 감소된다. 교과서에 있는 인플레이션 조세(inflation tax)가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인플레이션이 연 7%씩 10년간 진행되면 부채의 실질가치는 35%로 줄어든다. 헤어나기 어려운 재정적자와 불황을 생각할 때 실업률은 상승하고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그림자가 이미 가까이 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미국과 서유럽국가들은 그동안 힘들이지 않고 누려온 후생의 대가를 이제부터 지불하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소비 위축의 여파는 전 세계로 퍼질 것이다.

 한국의 재정적자는 아직은 위험수준이 아니라고 하지만 부채의 증가속도를 보면 마음 놓을 수가 없다. 가계·기업·공기업을 포함한 재정적자의 규모와 내용을 일반인들이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점도 하나의 문제다. 투명성이 부족하면 문제가 잠복되다가 어느 순간에 불거져 더 큰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

 해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미구에 닥칠 세계적 스태그플레이션과 그 파장을 미리부터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신세철 성도회계법인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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