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비명 토하게 하는 가계대출 중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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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금융 당국이 가계대출을 놓고 오락가락하고 있다. 농협·우리·신한 등 일부 은행들이 신규 가계 대출을 갑자기 중단하자 고객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은행 대출을 믿고 자금계획을 세웠는데 다 어그러졌다는 분노다. 금리가 비싼 제2금융권으로 가면 가계부채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는 불만도 나왔다. 그러자 금융 당국이 은행 책임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은행에 대출 규모를 적절하게 관리하라고 지시했을 뿐 대출을 중단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은행들에 대출 중단 조치를 철회하라고 했으니 그런 일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은행의 대출 전면 중단도 기가 차지만 당국의 발뺌하는 모습 역시 보기 안타깝다. 금융 당국이 일부 은행에 대출 자제를 권고한 건 사실이다. 더구나 가계대출 증가율이 전달보다 0.6%를 넘어선 곤란하다는 기준을 강조하면서, 지키지 못하면 강도 높은 검사를 받을 것이라고 시사했다. 그렇다면 이건 강요지, 권고가 아니다. 그런데도 여론의 반발을 사자 모든 책임을 은행에 떠넘기는 건 어불성설이다.

 특히 은행의 대출 억제 방식이 너무 거칠었다. 하루 전날 갑자기 고객들에게 “내일부터 대출 중단”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자금 계획을 세워놓았던 고객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이런 은행을 어떻게 금융사라 할 수 있겠는가.

 더 우려되는 건 가계부채에 접근하는 금융 당국의 방식이다. 8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를 줄여야 하는 건 맞다. 자칫하면 한국판 서브프라임 사태로 번질 수도 있다. 문제는 이를 전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다는 데 있다. 본란은 지난해부터 줄곧 적극적이고 신속한 대처를 당국에 주문해 왔다. 하지만 정부는 계속 미뤄 왔다. 그 결과 가계부채는 이제 너무 커져 버렸다. 이제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잘못 터져 버리면 그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다. 잘나가던 일본이 20년 전 장기 불황에 빠진 데는 거품을 끄려고 대출총량을 규제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금융 당국은 단기간에 해결해 보겠다고 설쳐서도, 모든 금융권과 금융사의 가계 대출을 한꺼번에 줄이겠다고 의욕을 부려서도 안 된다. 단계적이고 부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예컨대 가계 부채에서 가장 우려되는 건 저신용층의 부채다. 이들이 빚을 많이 지고 있는 곳이 제2금융권이다. 그렇다면 저신용층의 제2금융권 빚부터 줄여 그 파장을 시험해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충격이 크지 않다면 다른 소득계층과 제1금융권으로 넘어오는 수순을 밟는 건 어떨까. 이렇게 미시적이고 단계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계부채는 이미 너무 많고, 너무 꼬여 있다. 더구나 3주 뒤면 추석이다. 자금수요가 가장 많이 몰리는 시기다. 큰 원칙은 대출 억제지만 그 안에서 완급(緩急)과 경중(輕重)을 가리는 세련된 정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