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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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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발해의 무덤엔 부부합장묘가 많았던 모양이다. 여권(女權)이 강하고 일부일처제가 확립됐던 사회의 흔적이란 해석이 있다. ‘홍라녀’라는 발해 여인이 장군이 돼 거란과의 전쟁에 나가 이긴 뒤 남편을 구해 돌아왔다는 전설이 중국 동북부 지방에 남아 있을 정도니 수긍할 만하다. 그래서인지 발해의 남자는 첩을 제대로 둘 수 없었다. 첩은커녕 밖에 나가 딴짓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신라와 중국, 심지어 거란·여진족에도 있었던 홍등가나 창녀가 발해엔 없었던 것이다.

 발해는 말하자면 인류 성매매 역사에서 믿기지 않는 ‘예외’인 셈이다. 남녀가 있는 한 어느 시대, 어떤 제도하에서도 존재해 온 게 성매매이기 때문이다. 발해가 계승한 고구려만 해도 성매매를 하는 유녀(遊女)가 있었다. 신라에도 창녀와 음방(淫坊)이 있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전하는 김유신과 천관(天官)의 이야기가 그 예다. 조선시대엔 기녀에 의한 겸업 성매매가 일반적 형태였다. 은근자(慇懃者) 또는 은군자(隱君子)가 바로 은밀히 몸을 파는 기녀의 별칭이다. 기녀 외에도 화랑유녀(花郞遊女), 여사당(女社堂), 색주가(色酒家) 등의 이름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 성매매의 기저엔 경제적 궁핍이란 요인이 깔려 있다. 중세의 성매매 여성들은 대부분 오갈 데 없는 이들이었고, 18세기 산업자본주의 등장과 함께 극심하게 벌어진 빈부 격차도 빈민 여성을 성매매로 내몰았다. 1980년대 이후 프랑스에는 가난한 나라의 여성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파리 성매매 여성의 75%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6·25 전쟁 이후 ‘양공주’나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한 한국 부녀자들 상당수도 생활고가 원인이었다.

 성매매를 ‘필요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를 방치하기보다는 사회 문제로 보고 규제하는 경향도 강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4년 발효된 ‘성매매방지특별법’에서 성매매 금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결과는 ‘풍선효과’다. 집창촌은 쇠락했지만 변칙 성매매가 확산된 것이다. ‘스폰카페’가 알선하는 ‘스폰만남’이 그중 하나다. 재력 있는 남성이 매달 일정액을 주며 젊은 여성을 만나는 일종의 정기적 성매매다.

 검찰이 어제 스폰카페를 만들어 성매매를 알선한 사람을 기소했다. 스폰서를 연결해 달라며 회원으로 가입한 여성 상당수는 명품 구매나 성형수술비 마련 등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욕망과 더 많은 돈을 좇는 황금만능주의 세태가 어지럽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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