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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밸리의 두 얼굴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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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아이디어·기술 도용하는 ‘무늬만 벤처’도 있어

인터넷에 윈도의 개념을 도입해 웹 서핑을 할 수 있게 만든 ‘팝데스크’(popdesk)를 개발해낸 것이다. 인터넷에 능숙하지 않은 사용자가 단지 팝데스크상의 아이콘을 클릭하는 손쉬운 조작만으로 전혀 불편함 없이 인터넷 서핑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서비스다. 이는 국내에서는 최초이자 인터넷 선진국인 미국과도 불과 2주의 시차를 두고 발표된 신기술로, 서비스 개시 초기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는 유명 검색엔진인 심마니와 손잡고 ‘심마니 팝데스크 서비스’를 시작함으로써 더욱 큰 시너지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창업 1년만에 기업은 몰라보게 성장했지만 송사장을 비롯한 직원들은 창업초기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점이 없다. 다만 밤샘작업에 다들 익숙해져서인지 이제 여간해서는 쓰러지지 않는다. 다들 알아서 피곤하면 사무실 한켠의 쪽방에 마련된 2층 침대나 야전침대 위에 널부러져 잠을 청한다. 새벽 2시가 지나면 한명이 쓱 사라지고 3∼4시쯤 되면 몇명이 또 조용히 사라진다. 일하다 그냥 책상에 엎드려 자거나 의자를 여러개 붙여놓고 새우잠을 자는 이도 있다. 한마디로 대학 동아리방을 연상하면 될 것이라고 송사장은 설명한다.

그런데 최근 송사장을 괴롭히는 문제가 하나 생겼다. 모 인터넷 업체가 ‘팝데스크’ 프로그램의 소스코드를 도용해 똑같은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전 임직원이 몇달간 밤잠을 설쳐가며 탄생시킨 작품을 도둑질당했다는 사실에 송사장은 크게 상심했다. 현재 이 사건은 형사고발 조치돼 재판이 진행중이다.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벌어지는 ‘잠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상사 중 하나다. 그래서 어떤 업체에 가더라도 사무실 한쪽 귀퉁이에서 야전침대와 침낭 1∼2개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혹은 아예 침대방을 따로 마련해 놓는 경우도 있다. 아이마스의 김사장은 야근이나 철야중 잠시라도 직원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회사 근처에 따로 방을 얻을까도 생각중이다.

역삼역 부근 아주빌딩 1502호에는 한양대 공대 출신이 주축이 돼 창업한 (주)한국공간정보통신(KSIC)이 3주전 신접살림을 차렸다. 한국공간정보통신은 실험실 창업이 대부분 교수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과 달리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인현(34) 사장을 비롯해 석·박사 연구원들이 중심이 돼 창업한 경우로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들은 1998년 세계 최초로 ‘인터넷 3차원 지하매설물 관리시스템’을 개발해 정보통신부의 초고속 통신망 응용기술 개발사업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는 주로 국가 공공기관의 프로젝트를 맡아 수행하고 있으며 3월26일 미국 덴버에서 열릴 ‘지리정보기술협회 전시회’에 국내 최초로, 유일하게 참가해 전세계 132개 업체와 기술의 우열을 가리게 된다.

약 14: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테헤란밸리 입성에 성공한 김사장의 감회는 남다르다. 한양대 창업지원센터 시절, 10여명의 멤버가 10평 남짓한 학내 연구실을 전전하다 이제야 그럴 듯한 사무실을 마련한 것이다.

“좁은 학교를 떠나 이사하던 날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김사장은 테헤란밸리에 입성한 것이 아직도 꿈만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양대 시절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밤샘 작업’이다.

미국 전시회를 앞두고 준비를 하느라 며칠 밤을 새며 마음을 졸이는 사람이 있다. 바로 기술개발이사 오승(33)씨. 오이사는 집안에서 장손임에도 불구하고 밤낮없이 연구·개발에만 몰두하느라 그동안 제사나 부모님 생신 등 가족 대소사에조차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는 날을 보냈다. 이 죄스러움은 항상 오이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가정문제, 수면부족 문제에 이어 벤처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신경쓰는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먹는 문제’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시간이 되면 근처 식당에서 사 먹기도 하지만 도시락 전문집, 분식집, 중국집 등에서 배달해 먹는 경우가 대다수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탓에 업무의 단절을 최소화하려는 이유도 있고 아울러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한 강남지역의 물가가 높아 밥값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김인현 사장 역시 테헤란 밸리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먹는 문제’에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한양대 시절에는 학교 식당에서 1,000원짜리 식권 한장이면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테헤란밸리 중심지로 옮겨온 뒤로는 식비만 해도 만만치 않다. 그나마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것이 도시락집에서 파는 4,000원짜리 백반(아예 고정적으로 계약해 3,500원에 한끼를 해결하기도 한다).

저녁 7시쯤 되면 직원수대로 도시락을 주문해 각자 책상이나 회의실 공간을 이용해 두런두런 모여 식사를 한다. 집에서 도시락을 싸오는 경우도 있다. 집이 서울인 최은제(24·홍보담당)씨는 지방 출신인 동료를 위해 매일 2인분용 도시락을 준비해와 함께 식사를 한다. 다른 동료 한명도 또 다른 동료를 위해 최씨처럼 도시락을 하나 더 준비한다. 벤처기업에서만 볼 수 있는 정감있는 장면의 연출이다.

그래텍 임직원들의 저녁 식사 풍경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식사 메뉴를 굳이 한가지로 제한하지 않는다. 도시락 백반을 주문하는 사람부터, 짬뽕·자장면·컵라면·찌개·비빔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렇다 보니 사무실에서 제일 막내(그래텍에서는 막내를 밥돌이라고 부른다)는 ‘밥 때’가 되면 으레 식판을 돌리며 메뉴를 조사해 일일이 주문한다. 그릇을 들고 서서 먹는 사람,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밥 한 숟가락 뜨고 키보드 조작하는 사람 등 제각각이다.

Heavy Smoker 對 Non Smoker

아이마스처럼 건물 관리실에서 음식물 반입 자체를 금지당한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쉽게 밖으로 나갈 그들이 아니다. 식사를 배달하는 요식업계측에서는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듯 새로운 대응방식을 도입해 관리인의 감시의 눈초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음식 운반용 철가방(주로 중국집에서 사용하는)은 관리인에게 신분을 쉽게 노출시키는 탓에 주로 커다란 박스에 음식물을 담아 운반한다. 서류나 장비로 위장해 무사통과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관리실측에서 눈치 못챌 리 없지만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눈치다.

당장은 기술개발, 연구 그리고 먹고 자는 문제에 더 신경이 쓰이겠지만 그로 인한 불규칙적인 생활습관은 벤처기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가장 큰 재산인 ‘몸뚱아리’를 괴롭히는 결과를 낳는다. 유인커뮤니케이션의 이성균 사장은 얼마전 갑자기 목 부위에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심한 통증이 찾아와 한동안 고생하다 한의사를 찾아 침과 뜸으로 치료받은 후에야 겨우 나아졌다. 아이마스의 김민영 사장도 소화불량·위염 등 스트레스성 질환에 자주 시달린다고 말한다. 또 이들 벤처사업가들은 거의 대부분 불면증에 시달린다. 꿈을 꿔도 회사 꿈을 꾸고, 새벽에도 잠을 자주 깨는 등 숙면을 취하기가 힘들다.

최근 테헤란밸리 근처의 병원들을 찾는 환자 중 대다수는 인근 벤처타운에 근무하는 젊은 직장인들로,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질환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매일 새벽 늦게까지 격무에 시달리고, 과도한 흡연에 불규칙한 식사습관 그리고 업계 관계자들과의 잦은 술자리가 그 주범이다.

이처럼 벤처기업 종사자들에게 빈발하는 각종 질환을 가리켜 일부에서는 ‘테헤란밸리 증후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현상은 흡연량의 경우, 벤처기업 종사자들 사이에 양극화 현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벤처기업의 속사정에 밝은 링크 인터내셔널의 이재철 과장은,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경우 흡연을 하는 사람은 ‘헤비스모커’(heavy smoker)이거나 ‘논 스모커’(non smoker)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안철수 바이러스연구소의 안철수 소장이나 한국공간정보통신의 김인현 사장은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는 경우이고 아이마스의 김민영 사장, 그래텍의 송길섭 사장, 유인커뮤니케이션의 이성균 사장 등은 모두 하루 한갑 반에서 두갑 정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도 피우는 ‘heavy smoker’들이다.

기술 개발 속도가 워낙 빨라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는 데서 오는 중압감, 치열한 경쟁의식, 시장개척의 어려움, 잦은 접대로 인한 스트레스는 자연스럽게 줄담배를 피우게 만든다. 반면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벤처기업이 입주해 있는 공간이 대부분 금연지역인 까닭에 주위의 영향으로 담배를 피울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이과장의 설명이다.

벤처에 종사하는 이들의 일상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젊은 사람들이지만 건강에 적신호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운동량마저 절대적으로 부족해 피로가 누적되면 최악의 경우 ‘큰 일’을 치를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의들의 소견이다. 이렇다 보니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각 벤처 CEO들은 직원들의 심적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생명보험·종신보험 등 각종 보험에 무료로 가입시켜 준다.

니트젠, 한국공간정보통신, 아이마스 등 거의 대부분의 벤처업체들이 이 경우에 속한다. 아울러 간단한 운동기구를 사무실에 갖춰 놓고 활용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한글과컴퓨터(대표 전하진)다. 한컴은 헬스기구와 탁구대를 회사 건물 지하에 마련해 업무에 지친 직원들이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또 그래텍 직원들은 젊은 감각에 맞게 사무실에 비치된 DDR(Dance Dance Revolution) 기기를 수시로 이용한다. 최근에는 테니스·볼링·당구 등 직원들이 각자 자신의 구미에 맞는 체육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그 소요비용은 전액 회사가 부담한다.
기존의 대기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모습들 외에도 테헤란밸리에는 대기업 본사가 몰려 있는 강북과 비교되는 그 나름의 독특한 생활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우선, 테헤란밸리에서는 출퇴근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개개인의 업무 내용이나 사정에 따라 출퇴근 시간이 각기 다르다. 고객관련 서비스나 홍보를 담당하는 직원은 다른 직원들보다 좀 일찍 출근한다. 그들은 오전 9시부터 점심 직전까지가 가장 바쁜 시간이다. 또 기획·개발을 담당하는 경우는 조용하고 차분한 밤 시간에 업무효율이 높아진다며 새벽 늦게까지 밤샘근무를 습관적으로 하는 이도 있다.

대신 다음날 오전시간은 거의 취침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 CEO의 경우는 밤낮이 따로 없다. 오전에는 그날 할 일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새로 추가된 사항을 처리하느라 늑장을 부릴 여유가 없다. 또 오후부터 밤늦게까지는 본격적인 업무와 외부인사와의 미팅이 이어진다. 그래서 어떤 이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인 오후 7∼10시까지가 CEO들에게는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황금시간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벤처맨들에게 황금시간대는 오후 7∼10시

테헤란밸리에서는 헤어스타일이나 복장은 물론 업무진행 방식까지도 철저히 자유로움과 능동성 창의력을 강조한다. 그래텍에는 결재판이 없다. 업무보고를 일일이 격식을 갖춘 문서를 통해 진행하는 것은 형식일 뿐이고 결국 시간낭비라는 것이 송길섭 사장의 생각이다. 옷차림도 업무 성격과 어울리게 편한 캐주얼부터 부담스럽지 않은 정장까지 다양하다. 헤어스타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텍에서 웹디자인 팀장을 맡고 있는 이주환(30) 씨는 국내 유수의 모 광고회사에서 근무하다 대기업적인 조직생활이 자신과 맞지 않다고 느껴 과감히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경우다. 당시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은 취직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였던 시기에 그 좋은 회사를 그만둔 이씨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씨의 외모나 사고방식은 기존 대기업의 생리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귀를 완전히 덮을 정도의 긴 헤어스타일에 노란색과 갈색으로 염색을 하고 귀걸이…. 직장을 옮긴 이후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없이 근무에만 열중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 이씨의 말이다. 이씨는 현재 직원들 사이에서 한마디로 인기 ‘캡’이다. ‘DDR 황제’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춤 솜씨를 선보여 사내 분위기를 활기차게 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씨가 소위 ‘막나가는’ 젊은이는 아니다. 정기적으로 대학에 웹 제작 관련 특강을 나가기도 하고 틈틈이 외국어 공부도 열심이다.

이처럼 테헤란밸리의 독특한 문화는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쳐 테헤란로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밤샘 근무가 많다 보니 주변의 24시 편의점 역시 벤처밸리로 탄생하기 이전보다 매출이 1.5배에서 많게는 2배까지 늘었다. 또 테헤란밸리의 모든 통신망을 총괄하는 영동전화국의 경우 타 지점과 비교해 전국 최고의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으며 한국통신 직원들 역시 ‘물 좋은’ 영동전화국으로 발령나기를 은근히 바라는 눈치라고 한다.

IMF사태가 터진 직후부터 테헤란로 일대에는 ‘임대’라는 플래카드가 고층빌딩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다. IMF 직격탄을 맞은 은행·종금사 등 금융기관들이 퇴출되면서 생긴 빈자리였다. 당시 임대료는 평당 220만∼240만원. 서울 강북지역이 평당 350만∼450만원 하던 때였다. 그러던 것이 불과 1년6개월여만에 180도로 상황이 바뀌었다. 벤처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그동안 분양이 잘 안되거나 임대가 남아돌던 오피스텔의 인기가 치솟았다.

강남역 부근에서 S부동산 중계소를 운영하는 박강식(朴康植·48)씨는 “더이상 테헤란밸리에서 ‘빈방’을 찾기 힘들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평당 400만원선에 거래되던 오피스텔이 올해 들어선 100만원이나 올라 500만원선에도 구할 수가 없을 정도”라며 혀를 내두른다. 그 영향으로 테헤란밸리를 중심으로 압구정·청담동·양재동 멀리는 신림동·여의도까지 벤처밸리의 형성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빈방 구하기가 힘들기는 부근의 호텔이나 장급 여관도 마찬가지. 각 벤처기업과 관련한 국내외 투자자들과 바이어 등 관련업계 사람들의 방문이 잦은 탓에 주말에는 특히 빈방을 구하기가 어렵다.

테헤란로엔 빈 방이 없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과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홍보담당 직원들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각각 80건과 30건이 넘는 벤처기업 관련 행사를 개최,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두배 이상의 유치건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특히 지난 2월15일부터 3일간 코엑스 인터컨티넨탈에서 개최된 벤처 종합전시회인 ‘세미코리아 2000’ 행사로 인해 전체의 70%가 넘는 총 700실의 객실이 이 행사에 참여한 벤처기업인들에게 할당됐다고 호텔측은 밝혔다. 링크인터네셔널의 이재철 과장은

“몇몇 호텔들은 예약하려고 하면 탐탁찮게 생각하는 것 같다. 예약 취소율이 높은 데다 호텔방을 찾는 수요가 워낙 많기 때문에 그때그때 찾아오는 손님을 받는 것이 훨씬 이익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테헤란에 벤처타운이 형성된 이후 나타난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경향은 새로운 명소와 다양한 모임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남구 역삼동 선릉역 부근의 ‘정보카페’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T-valley Club’ ‘까당스’ 등 친목과 정보교류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다주는 인적 네트워크 인프라 구축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이들 벤처기업 종사자들을 지칭하는 새로운 용어도 생겨났다. ‘다이아몬드 칼라’와 ‘르네상스 칼라’가 그것이다. 전자는 네트워크에 능한 세대를 가리킨다. 다이아몬드는 뾰족한 각을 중심으로 여러 면과 각이 방사형으로 뻗어 있다. 즉 다이아몬드 칼라는 한가지 직종에 근무하면서도 다른 분야에 다양한 (인적)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업계에서 주목받는 사람들은 다이아몬드 칼라가 아니다. 다이아몬드 칼라도 이미 옛날 얘기가 돼 버렸다는 뜻이다. 요즘에는 ‘르네상스 칼라’로 점차 대체되고 있다.

이들은 문화면 문화,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등 모르는 게 없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즉,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벤처업계에는 “All Round Player”라 할 수 있는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며,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벤처업계는 단순히 인터넷과 컴퓨터를 잘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곳이 아니다. 컴퓨터 실력보다 창의력과 순발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다. 다양한 경험을 쌓아 격변하는 세상과 몸으로 부대껴온 이들, 그리고 그 변화를 자신에게 이롭게 받아들이는 ‘르네상스 맨’만이 디지털 시대를 헤쳐나갈 힘이 있다는 말이다.

불과 1년 사이에 벤처창업 열풍이 온 나라를 강타하고 특히 테헤란밸리가 그 중심지로 떠오르자 이곳에는 별의별 소문이 떠돌기도 한다. 그 중에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내용도 전해진다. 그 첫번째가 ‘5% 괴담’이다. 2∼3년 뒤까지 살아남는 벤처기업의 수는 고작해야 100개 중 5개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그것이다.

새롬기술·네이버·다음·골드뱅크 등 몇몇 벤처기업의 주가가 하룻밤 사이에 폭발적으로 뛰고 수백억원을 벌어들인 투자가들의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면서 앞 뒤 재지 않고 벤처창업과 벤처투자에 나서고 있는 과열현상을 단순히 우려하는 말이 아니다. 독보적인 기술이나 아이템 없이 고만고만한 콘텐츠를 가지고 섣불리 창업했다가는 실패와 좌절이 불을 보듯 뻔하다는 얘기다.

심지어 일단 창업한 뒤 코스닥에 상장시켜 주식차액으로 떼돈이나 벌어보자는 허황된 기업들마저 지적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초창기에 그랬듯이 5%는커녕 1%정도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더 극단적인 말도 있다. 5%가 살아남든 1%가 살아남든 빈 자리는 다시 새로운 업체들로 채워지게 마련이고 시행착오를 거쳐 거품이 걷히면 점차 건실한 기업들이 늘어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보는 이도 있다.

테헤란밸리를 떠도는 괴담들

현재 테헤란밸리에는 시작 당시에는 참신한 콘텐츠였지만 내심으로는 1∼2년 후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불안감을 느끼는 업체들도 많다. 이런 업체들 사이에서는 타 업체와 합쳐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구상도 한창 진행중이다. 벤처업체끼리의 전략적 제휴나 M&A 열풍이 머지 않았다고 전망되기도 한다.
하룻밤 술값으로 수백만원씩 쓰고 다니는 벤처사업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린다. 현장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링크인터네셔널의 정길남 차장은 “대부분의 벤처기업가들은 밥 먹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일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한두건 있는 사실이 마치 벤처기업가들의 일반적 행태인양 과장된 것 같다”고 덧붙인다. 유인커뮤니케이션의 이성균 사장 역시 “벤처기업도 사업이다 보니 접대다 뭐다 해서 술자리가 많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어쩌면 그 기업에 투자해 주식으로 떼돈을 벌어들인 투자자의 얘기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또 모 룸살롱 마담은 술을 마시러 온 벤처기업가들의 얘기를 귀담아 들었다가 나중에 그 벤처기업에 투자해 수억원의 돈을 벌어 자신의 가게를 차렸다는 소문도 있다.

벤처기업 종사자들이 자주 간다는 강남역 부근의 룸살롱 ‘라마단’. 여기에 근무하는 박상명(가명·27세)씨는 “예전에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손님들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단골 벤처기업가들이 손님 접대차 예약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하룻밤 술값으로 보통 200∼300만원 정도는 쓰고 간다”고 귀띔한다. 박씨는 또 “접대부 아가씨들도 얼마 전까지는 화장품, 옷가지들 사는데 많은 돈을 썼지만, 최근 들어 벤처기업 주식에 투자하는 경우가 늘었다”한다. 이들 유흥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마저 이제는 너나할 것 없이 벤처기업에 투자해 대박을 터뜨리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마스의 김민영 사장은 “그렇지 않아도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이 창업을 위해 사표를 쓰고 나가는 판국에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남아있는 샐러리맨들의 박탈감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벤처기업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걱정섞인 표정을 짓는다. 현재의 고된 삶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불안, 그리고 온갖 루머가 뒤섞여 있는 이곳 테헤란밸리. 샐러리맨들은 왜 안정된 직장을 떠나 이곳으로 몰려드는 것일까.

테헤란밸리의 벤처기업 종사자들 중에서 그 첫째 이유로 큰 돈을 벌고 싶어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돈이 이곳을 선택한 첫번째 이유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미쳐 있다는 것이다. 업체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평균 연봉 1천몇백만원 정도밖에 안되는 돈을 받으면서도(기자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월 50만원 정도를 받아 겨우 생활하는 한 기혼 벤처기업 종사자도 있었다) 쉽게 이 바닥을 떠나려 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들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막대한 스톡옵션을 챙길 수 있으니 벤처기업가들은 다들 상당한 부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지탱해 주는 것은 연봉도 스톡옵션도 아닌 미래에 대한 비전이었다.

성공이냐 실패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수많은 테헤란밸리 사람들. 그들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1년 혹은 2년후 테헤란밸리는 또 어떤 얼굴로 변할까 무척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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